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기준금리를 과도하게 낮추면 실물경기 회복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경기부양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부작용을 고려해 속도 조절에 나설 수 있다는 취지로 파악된다.
이 총재는 이날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별관에서 창립 75주년 기념식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 총재는 "올해 경제성장률은 0.8%로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위기를 제외하면 지난 30년 간 가장 낮은 수준"이라며 "경기부양 정책이 시급해졌다고 보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지난해 10월 이후 네 차례 기준금리 인하를 통해 경제 활력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어느 정도의 경기부양이 적절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선 낮은 성장률을 단순히 경기순환의 관점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시각에서도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저출생·고령화 문제, 일부 산업에 집중된 수출 구조 등으로 분기 기준 역성장을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이런 변화를 고려하면 현 상황에서 경기회복을 위한 부양책이 시급한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성장잠재력의 지속적인 하락을 막고 경기변동에 강건한 경제구조를 구축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며 "급하다고 경기부양 정책에만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사후적으로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기준금리 인하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총재는 "기준금리를 과도하게 낮추면 실물경기 회복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며 "손쉽게 경기를 부양하려고 부동산 과잉 투자를 용인해온 과거의 관행을 떨쳐내야 한다"고 했다. 미국과의 금리 인하 속도 차이로 환율이 다시 반등할 가능성도 언급했다.
이 총재는 "앞으로의 금리 정책은 인하기조를 유지하되 구체적인 인하 폭과 시점은 향후 거시경제와 금융지표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며 신중히 결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새 정부가 구조개혁에 적극 나서달라는 주문도 했다. 한은은 그동안 '거점도시 육성', '지역별 비례선발제', '고령층 계속고용', '돌봄서비스 개선 방안' 등 구조개혁 개혁 보고서를 잇따라 제시했다. 이 총재는 "새로 출범한 정부가 구조개혁 과제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당면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화제로 떠오른 스테이블 코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총재는 "원화 표시 스테이블 코인은 핀테크 산업의 혁신에 기여하면서도 법정화폐의 대체 기능이 있다"며 "안정성과 유용성을 갖추는 동시에 외환시장 규제를 우회하지 않도록 제도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은이 진행하고 있는 예금토큰 기반 디지털화폐 프로젝트 '한강', 국가 간 송금을 연구하는 프로젝트 '아고라' 등도 언급했다.
이 총재는 직원들에게 "위에서 내려온 과제를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 한은의 변화를 주도해달라"고 당부했다. 윈스턴 처칠의 격언인 '개선하려면 변해야 하고, 완벽해지려면 자주 변해야 한다'를 인용하면서 "여전히 '총재님 말씀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직원이 많지 않다"며 "더 많은 변화가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