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의 '침묵의 미학', 호암의 자연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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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실렌티움(묵시암)', 2025, 아크릴 (바닥), 자갈, 270 x 340cm / 사진. © Lee Ufan, 김상태, 제공. 호암미술관

이우환 '실렌티움(묵시암)', 2025, 아크릴 (바닥), 자갈, 270 x 340cm / 사진. © Lee Ufan, 김상태, 제공. 호암미술관

‘실렌티움(Silentium)’은 라틴어로 침묵을 뜻한다. 화가 이우환(89)은 이를 우리말로 ‘고요함 속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은 묵시암(默視庵)이라 바꿔 말한다. 입을 닫을 때 눈과 귀가 열리듯, 침묵은 감각의 차단이 아닌 새로운 에너지를 느끼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묵시암이라는 단선적 표현을 입체적으로 넓히면 ‘조용한 눈길로 만나는 공간’으로 펼쳐볼 수 있다. 평소 “버리고 비우면 보다 큰 무한이 열린다”고 설명한 이우환의 예술 철학과 맞닿아 있는 개념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이우환이 재해석한 침묵의 미학을 직접 느껴볼 기회가 생긴다. 28일부터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이 이우환의 신작 공간 ‘실렌티움(묵시암)’을 개관하고 조각, 설치 작품을 상설 전시한다. 국제 무대에서 활동 중인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서울·수도권에서 사시사철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는 게 미술계의 평가다.

실렌티움(묵시암), 2025, 철판, 자연석 / 사진. © Lee Ufan, 김상태, 제공. 호암미술관

실렌티움(묵시암), 2025, 철판, 자연석 / 사진. © Lee Ufan, 김상태, 제공. 호암미술관

실렌티움은 호암의 백미로 꼽히는 미술관 앞 정원 ‘희원’에 자리 잡는다. 희원은 인위적 개입을 줄여 사람이 자연스럽게 자연과 어우러지는 ‘한국식 전통 정원’의 표본으로, 이우환이 직접 프로젝트를 진행할 장소로 제안했다. 침묵 속에서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관계와 만남을 느끼는 총체적인 공간 작업을 구상하면서다. 작가는 “내 작품은 보자마자 감각이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과 에너지가 중요하다”며 “(관람객이) 침묵 속에 머물며 세상 전체가 관계와 만남, 서로의 울림과 호흡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람객은 실렌티움 입구에서 무거운 돌과 두꺼운 철판으로 구성된 설치 작업 한 점을 만난다. 실내로 들어서면 세 개의 방을 마주한다. 왼쪽 방의 ‘플로어 페인팅(Floor Painting)’은 극한의 우주로 확장되는 ‘원’의 형태를 표현해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중간 방의 ‘월 페인팅(Wall Painting)’의 점은 이우환 예술의 출발점이자 귀환점이다. 극도로 절제된 붓놀림이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주는데, 미세한 색채의 변화 속에서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이 만나 더욱 큰 조화를 이룬다.

이우환 '관계항 – 튕김',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자연석, 자갈 / 사진. © Lee Ufan, 김상태, 제공. 호암미술관

이우환 '관계항 – 튕김', 2025, 스테인리스 스틸, 자연석, 자갈 / 사진. © Lee Ufan, 김상태, 제공. 호암미술관

오른쪽 가장 안쪽에 자리한 ‘쉐도우 페인팅(Shadow Painting)’은 돌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와 작가가 그린 그림자가 함께 드러난다. 자연과 인간의 상상력이 중첩되는 지점을 표현한 것으로, 관객은 이 작품을 통해 현실과 환영, 욕망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다. 미술관은 특히 이번 작품에서 색채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호암 관계자는 “작가는 주로 단색 계열 작업을 해왔지만, 이번 실렌티움에서는 색채를 적극 사용했다”면서 “작품 속 점과 원에서 보여지는 색채는 가장 연한 색에서 진한 색으로 서서히 변화하는 방식으로 생명의 변화와 순환을 보여준다”고 했다.

희원 건너편 미술관과 너른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얕은 구릉지 산책로인 ‘옛돌 정원’에서도 이우환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철과 돌이라는 문명과 자연이 만나 이뤄진 3점의 대형 신작이 설치됐다. 옛돌 정원은 그간 관람객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공간이다. 미술관 측은 경사진 구릉과 시원하게 트인 호수 조망 등 다채로운 풍광이 이우환의 작품과 조응해 관람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이우환 작가가 '실렌티움' 내 플로어 페인팅 위에 서 있는 모습. /사진. © 이재안, 제공. 삼성문화재단

이우환 작가가 '실렌티움' 내 플로어 페인팅 위에 서 있는 모습. /사진. © 이재안, 제공. 삼성문화재단

입구에 설치된 ‘관계항-만남(Relatum-The Encounter)’은 지름 5m은 스테인리스 스틸링 구조로, 향후 고리 양쪽을 마주보는 두 개의 돌이 더해질 예정이다. 이 밖에 호숫가에 직선으로 뻗은 20m의 슈퍼 미러 스테인리스 스틸판과 돌로 구성된 ‘관계항-하늘길(Relatum-The Sky Road’)도 볼 수 있다. 위쪽 산책로에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두 개의 자연석이 역동적 균형을 이루는 ‘관계항-튕김(Relatum-Bursting)’이 설치됐다. 작가가 1970년대 흔들리는 얇은 철판으로 형태를 구상했던 것을 발전시켜 두꺼운 재료로 구현한 작품이다.

이번 호암과 이우환의 협업 프로젝트는 2003년 호암갤러리·로댕갤러리 회고전 이후 20여년 만이다. 이우환의 작업활동을 곁에서 지켜보며 오랜 시간 동안 지원해온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은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싶었지만 그간 상설로 선보일 기회가 많지 않았다”면서 “이번에 선생님이 ‘실렌티움’과 야외 조각을 직접 제안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이우환의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관람료는 2만5000원(기획전+희원+실렌티움+옛돌정원 관람)으로, 28일부터 1주일 간 리움 멤버십 프리뷰를 거쳐 다음달 4일부터 일반 공개된다.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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