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의 넥스트 거버넌스] 〈23〉결정한 사람이 기억되는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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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사고가 나면 대한민국에는 익숙한 장면이 반복된다. 실무자가 조사를 받고, 중간 관리자가 고개를 숙이고, 기관장이 옷을 벗는다. 여론이 가라앉으면 막이 내린다. 한 때 이 문화는 아랫사람의 잘못까지 윗사람이 짊어지며 조직의 기강을 세우고 책임의 무게를 가르쳤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달라졌다. 옷을 벗는 사람은 있는데, 정작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책임지는 장면만 있고 책임은 사라졌다.

무안공항 참사 앞에서 우리는 활주로와 둔덕의 문제를 물었다. 그러나 30여년 전 그 공항의 입지를 결정한 사람들, 감사원이 경제성을 문제 삼았는데도 예산을 통과시킨 사람들, '부서지기 쉽게 설계하라'는 지침을 서류에 적어두고도 콘크리트 둔덕을 승인한 사람들의 이름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조사와 문책은 사고 당시의 현장 언저리만 맴돌았다.

행정 전산망도 마찬가지다. 2023년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지난해에는 데이터센터 화재로 정부 시스템 수백개가 다시 멈춰 섰다. 두 번 모두 밤을 새운 것은 현장의 실무자들이었다. 그러나 십수년 전 계획된 재해복구센터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이유를, 첫 마비 후 약속한 이중화 예산이 집행되지 않은 이유를, 2년 만에 나온 감사 결과가 그 지연조차 다루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주는 이는 없다. 결정은 있었는데, 그 결정의 주인은 어디에도 없다. 참사에는 반드시 씨앗을 심은 손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 쓴 열매가 떨어진 자리에 서 있던 사람만 문책한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문제는 시간이다. 공항 하나가 세워지고 재해복구센터 건립이 미뤄지는 데는 10년, 20년이 걸린다. 그사이 결정한 정치인은 임기 뒤로, 결정한 관료는 승진과 인사이동 뒤로 사라진다. 결과 앞에 서 있는 것은 언제나 그 시점의 실무자들이다. 이 시차가 무책임의 은신처다. 그 그늘에서 지역구를 위한 사업이 국익을 밀어내고, 선거의 시간표가 안전의 시간표를 앞지르며, 부처의 권한 다툼이 전문가의 경고를 덮는다. 필자는 국회와 정부에서 그 그늘을 여러 번 보았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정책실명제가 이미 있지 않으냐고. 맞다. 있다. 그러나 그 제도는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정작 결정의 상류인 국회의 입법과 예산은 기록 대상이 아니다. 결정이 훗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되짚는 일도 없다. 무엇을 기록할지는 기록될 사람들이 스스로 고른다. 뜨거운 결정일수록 목록에서 조용히 빠지는 이유다. 실명제는 태어났으나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

국가는 망각할 권리가 없다. 선진국은 단순히 제도를 많이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과거의 결정이 현재의 성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책임의 영속성'을 증명하는 나라다. 한 세대의 결정이 다음 세대의 재앙이 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강력한 아카이빙(Archiving·기록 보존)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야 국가는 결정을 기억하고, 기억되는 줄 아는 사람은 더 신중해진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 제안을 쓰는 필자에게는 두려움이 있다. 이름이 남는 제도가 마녀사냥의 사냥터가 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결재선을 쪼개고 위원회 뒤에 숨는 회피 기술만 낳지는 않을까. 그래서 이 제안에는 반드시 짝이 있어야 한다. 소신 있게 도전한 실패는 두텁게 보호하고, 흔적을 지우려는 결정만 무겁게 묻는 것이다. 벌하기 위한 이름이 아니라, 신중해지기 위한 이름이다.

수습한 사람이 책임지는 나라에서, 결정한 사람이 기억되는 나라로. 그래야 권한과 책임이 다시 만나고, 국가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이 넥스트 거버넌스가 설계해야 할 새로운 국가 운영 시스템이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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