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허정]반도체 호황기, 정부의 안전판 역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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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초호황이 곧 한국경제 체력은 아냐
지금 투자한 인프라 장기 정책비용 될 우려
기업-금융시장-정부 함께 가속페달 밟는데
정부는 급커브도 살펴 충격 완충장치 둬야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요즘 한국 경제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쩍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반도체 수출과 기업 이익이 늘면서 올해 성장률 전망치도 덩달아 올라갔고 정부는 반도체,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3대 축으로 하는 경제성장 전략까지 내놓았다.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고 여겼던 우리 국민들로서는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현상을 한국 경제의 장기 추세가 바뀌는 신호로 해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솔직히 나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우리의 이성도 함께 붕 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장률이 높아졌다는 사실에 환호하는 데서 나아가 그 성장이 어디서 비롯됐고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일이다. 이제 경제의 기본 상식으로 돌아가 차분히 하나씩 생각해 보자.

우선 실질성장과 명목소득의 증가부터 구분해 보자. 최근 경상 국내총생산(GDP)이 크게 늘어난 데에는 반도체를 비롯한 수출품 가격 상승과 교역조건 개선이 상당한 몫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팩트다. 물론 가격이 올라 기업 이익과 국민소득이 늘어난 것은 엄연한 실제 이익이다. 다만 가격이 좀 올랐다고 해서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마저 그만큼 튼튼해졌다고 볼 수 있을까. 가격은 생산성보다 훨씬 빠르게 오를 수 있고, 거꾸로 훨씬 빠르게 주저앉을 수도 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는 호황기에 늘려놓은 설비가 몇 년 뒤 고스란히 공급 과잉으로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해 왔다. 지금의 가격효과가 명목소득을 늘리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를 두고 생산능력이 근본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선상에서 보면 반도체 호황과 잠재성장률 상승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잠재성장률은 노동, 자본, 생산성 그리고 산업 전반의 혁신역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특정 업종의 특정 시기 호황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반도체 수출이 아무리 크게 늘어도 서비스업과 비반도체 제조업, 중소기업과 지역경제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면 과연 성장 기반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아직은 그렇게 판단하기 이르다.

고환율 문제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고환율은 성장통이 아니라 만성통증으로 봐야 한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기업의 원화 환산이익은 커질 수 있다. 그러나 수입물가와 중소기업의 생산비는 오르고, 가계의 실질구매력은 낮아진다. 그런데 이 부담은 모두에게 같지 않다. 반도체 호황의 온기는 대기업에 먼저 돌아가는 반면, 수입물가 상승의 무게는 저소득 가계에 더 크게 얹힌다.

여기서 더 우려되는 두 가지를 짚고 싶다. 첫째, 지금의 일시적인 반도체 가격 호황이 장기적인 정책 고정비용으로 굳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반도체 가격과 기업 이익이 오른 지금 새로운 지역의 산업단지와 전력·용수시설에 대규모 정책 지원을 확대한다고 한다. 호황이 이대로 계속된다면야 하등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몇 년 뒤 가격이 꺾이고 기업이 투자계획을 축소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업의 설비투자는 손실이 나면 기업 스스로 규모를 줄이거나 계획을 접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지어진 공공 인프라와 이미 집행된 정책금융은 그렇게 되돌릴 수가 없다.

둘째,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정부 정책이 반도체 경기에 지나치게 순응(pro-cyclical)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정부의 역할은 민간이 과열될 때는 브레이크를, 식을 때는 액셀을 밟아 경기의 진폭을 줄이는 데 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가고 있다. 기업이 투자를 늘리고 금융시장이 자금을 몰아주는 바로 그 순간에 정부까지 같은 방향으로 정책금융과 인프라 투자를 늘리고 있다. 기업과 금융, 정부가 한꺼번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는 셈이다. 당장은 성장률과 투자, 세수 숫자가 다 좋아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 호황을 이끌었던 가격 변수가 꺾이는 순간, 이번에는 기업 투자와 금융 공급, 세수가 한꺼번에 무너진다. 안전판이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증폭판이 돼 있는 격이다.그렇다면 정부의 역할은 명확하다. 기업은 성공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겠지만 정부는 전망이 빗나갈 가능성까지 계산해 스트레스 테스트(위기 시 건전성 관리)를 해봐야 하고, 호황기에 늘어난 세수도 무리한 지출로 쓰지 말고 상당 부분 적립해 둬야 한다. 경제 현상이 예전과 달라 보인다고 해서 기본적인 경제이론까지 무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기업이 가속페달을 밟을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 길 앞의 급커브를 미리 살피고 충격을 견뎌낼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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