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푸드는 먹는 음식을 넘어 인간성과 다양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입니다. 속도와 저렴한 가격에 매몰돼 효율성과 통제를 중시하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철학이죠. <슬로푸드 선언>은 그 철학을 누구나 알기 쉽게, 친절히 담고 있는 책입니다.”
김종덕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장(사진)은 2일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 같은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쉽게 얘기해 패스트푸드가 획일적이라면 슬로푸드는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덧붙였다. 슬로푸드란 좋고(good) 깨끗하고(clean) 공정한(fair) 음식을 통해 사회 전체를 바꾸자는 운동이다. 먹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농업, 환경, 지역 공동체, 나아가 삶의 철학까지 확장하는 개념이다.
슬로푸드협회의 대표 활동은 ‘맛의 방주’ 프로젝트다. 사라져가는 토종 식재료와 전통 음식을 기록·보존하는 사업으로, 한국은 전 세계 6500개 품목 중 124개를 등재했다. 가장 최근 등재된 식품은 지난 7월 오른 ‘등겨장’이다. 보리 부산물을 활용해 만든 찍어 먹는 장으로, 경상도 지역의 토속 음식이다. 김 회장은 “사소해 보이는 장 하나에도 한국인의 삶과 문화가 응축돼 있다”며 “이런 음식은 대량생산 체제에서는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맛의 방주에 오르면 그 자체로 홍보되고 사람들이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슬로푸드 운동을 한국에 소개한 개척자다. 2000년 이탈리아 국제 슬로푸드 행사에 초청받아 슬로푸드 문화와 철학을 직접 경험하며 “한국에도 이런 인식이 확산하면 좋겠다”는 확신을 갖고 슬로푸드 운동을 한국에도 선보였다. 2007년 12월 설립된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회원은 활동 회원 1500명을 포함해 총 3000여 명에 달한다. 매년 200명씩 꾸준히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슬로푸드 철학 중에서도 ‘집사 정신’에 현대 사회가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6월 한경매거진&북이 발간한 앨리스 워터스의 <슬로푸드 선언>에서도 강조된 내용이다. 집사 정신은 땅을 돌보고 음식을 존중하며 자연을 보살피는 태도를 의미한다. 김 회장은 “우리는 음식을 소비재로만 생각하지만 슬로푸드 문화는 제철과 로컬 음식을 먹고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지향한다”며 “지금처럼 겨울에 여름 음식을 찾고 생산주기를 단축해 40일 키운 닭을 먹는 건 맥락을 잃은 삶이지만, 음식에는 반드시 시간과 공간의 맥락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특히 청소년에게 이 같은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는 “<슬로푸드 선언>이 삶의 가치관을 확립해가는 중·고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아이들이 한국의 치열한 경쟁 사회 안에서 길러지는데 이 책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고 했다. 이어 “교육 현장에서 이 책을 토대로 토론하고, 슬로푸드 교육을 하면 아이들이 자기 삶과 생태 환경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며 “결국 슬로푸드는 관계를 회복하는 운동”이라고 덧붙였다.
슬로푸드를 생활 속에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조리의 회복’을 꼽았다. 김 회장은 “조리를 거창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라면 대신 우리 밀 국수를 삶아 먹거나 누룽지를 끓여 먹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며 “두부나 간장을 고를 때 국산을 선택하는 것, 정제염 대신 천일염을 쓰는 것 같은 작은 실천이 쌓여서 슬로푸드가 된다”고 설명했다.
김소현/사진=문경덕 기자 alp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