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는 이제 저무는가."
지난 10년간 잊을 만하면 기술 업계는 실리콘밸리의 위기와 중국의 부상을 주장해 왔다. 일론 머스크, 피터 틸, 래리 엘리슨 같은 거물들이 잇따라 실리콘밸리를 떠났고, 베이징에서는 인공지능(AI) 논문 인용 수가 미국을 추월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빅테크 6개 기업의 시가총액이 중국 상장사 전체를 압도하는 현실 앞에서, 실리콘밸리의 부고는 번번이 시기상조로 판명됐다.
세계의 이목이 자극적인 양강 구도의 거대 서사에 쏠리는 과정에서 세계 기술 지형이 미·중 양강 구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팩트'는 무시되고 있다. 전 세계 모바일 기기 90% 이상에 탑재되는 칩을 설계하는 ARM은 영국 기업이고,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는 대만에, 반도체 노광장비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ASML은 네덜란드에 있다. 세계경제포럼과 유엔에서 국가 경쟁력을 연구해온 메흐란 굴은 이 균열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3대륙 8개국을 직접 누비며 20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물이 신간 '혁신의 지리학'이다.
그에 따르면 실리콘밸리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 유니콘들이 세계 각지에서 이미 싹을 틔우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 책은 중국, 미국, 영국, 한국, 싱가포르, 스위스, 독일, 캐나다 등 8개국의 혁신 생태계를 각각 고유한 DNA로 해부한다. 중국은 모방자에서 창조자로 탈바꿈한 '조숙한 학생'이고, 캐나다는 제프리 힌턴이라는 한 이민자 연구자가 국가의 기술 지형을 통째로 바꿔놓은 '천재 수입국'이다. 독일의 300만 미텔슈탄트(중소기업)는 빅테크 없이도 틈새 기술의 심연을 장악했고, 싱가포르는 인구 600만명의 한계를 국가 주도의 치밀한 설계로 돌파했다.
특히 한국 독자 입장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국내 기업의 혁신 전략에 할애한 챕터다. 저자는 한국을 '압도적 차이'를 추구하는 기술 선도국으로 명명하며, 이를 삼성이 대중화한 '초격차 전략'의 연장선에서 읽어낸다. 식품 회사에서 반도체 거인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재발명해 온 한국 기업의 생존 본능을 경영학의 고전 '혁신 기업의 딜레마'를 정면 반박하는 유일한 사례로 평가했다. 나아가 쿠팡, 몰로코 같은 3세대 '하이브리드 기업'이 AI 기반 최첨단 분야에서 글로벌 판도를 바꾸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책의 미덕은 기술 트렌드의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혁신이 천재 한 명의 산물이 아니라 특정한 제도와 문화, 자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는 구조적 시각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구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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