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APEC 정상회의 예술총괄감독 맡은 양정웅 연출가
해외 정상·대표단에 韓 예술 알릴 기회… 세계적 인기 끄는 K콘텐츠 다양해져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행복한 고민… 전통문화와 첨단기술 결합 시 폭발력
집시처럼 해외 돌며 공연한 경험 녹여… 20년 전 부산 APEC보다 다채롭게
양정웅이 다시 국가적 행사 무대로 돌아왔다. 이번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예술총괄감독이다. APEC은 미국과 캐나다, 중국,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모이는 주요한 외교 행사로, 각국 대표단과 비즈니스 관계자 등을 합치면 참가 규모는 2만 명에 이른다. 10월 말부터 열리는 이 행사에서 양 감독은 정상 갈라 만찬을 비롯한 주요 문화, 예술행사를 총괄하게 된다.》
양 감독은 “경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키웠던 ‘신라의 꿈’을 디지털 기술과 접목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각국 정상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1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K팝과 K푸드, K드라마 등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연출의 소재들이 정말 많아졌다”며 “무엇을 골라서 보여줘야 할지 모를 정도여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비상계엄과 탄핵 등으로 APEC 준비가 지연됐는데, 맡은 분야 상황은 어떤가.“외국 정상들과 대표단에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알리겠다는 방향과 목표가 확실하다. 행사 콘셉트를 잡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실질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메시지, 콘셉트와 공연의 디테일을 잘 조합시키는 게 중요하다.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면서 플랜 B에서 C, D, 그 이상으로 최대한의 것을 만들어가는 시뮬레이션 작업을 하고 있다.”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책임자 자리를 고사한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부담은 없었는가.
“문화와 예술은 정치와 모든 걸 넘어서 자유롭게 대중을 만난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일이다. K콘텐츠가 역대급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때에 한국의 문화 저력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제안을 받았을 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번 APEC 주제가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이고 중점 과제는 연결· 혁신·번영이다. APEC이 함께하는 미래에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발전적인 메시지를 문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다.” ―한국, 특히 경주의 특징과 매력을 잡아내는 게 중요할 것 같다.“제 본적이 경주다. 경주시 황오동 16번지. 방학 때면 할머니 집으로 내려와 신라 왕릉에서 미끄럼 타고 개구리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경주를 소재로 한 ‘미실’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때 배우들을 데리고 경주로 내려가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작품을 만들고 워크숍을 하면서 ‘신라의 꿈’을 펼쳤다. 그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의 매력을 보여줄 것이다.”
배우 출신으로 연극 무대 연출을 해 온 양 감독은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에 이어 지난해 강원 겨울청소년올림픽 개·폐회식 등 국가급 대형 행사, 성남페스티벌과 명량대첩축제 같은 지자체 이벤트 무대를 진두지휘한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남북, 북-미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에 김여정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 참석으로 주목받았던 평창 올림픽은 “미사일을 쏘네 마네 하면서 전쟁 나기 직전까지 갔던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마음 졸이고 간절히 기도하며 준비했던 행사”라고 회고했다.
―당시 현대적 정보기술(IT)을 융합한 독창적인 무대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디어 아트, 뉴폼 아트라고 부르는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접목은 내가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강의를 한 분야이기도 하다. 인간은 예술과 인간성을 찾는 아날로그적 본성이 있는데, 동시에 디지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장르적인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엮어내느냐는 미래 숙제다.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하는 젊은 세대들이 있고, AI나 기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변한다. 미디어 아트가 전통과 현대의 예술과 만났을 때 어떻게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한다. APEC에서도 이를 콘셉트에 맞게 잘 보여줄 방법을 찾고 있다.”
―APEC은 21개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난도가 높은 행사다. 기존의 다른 행사들과 차이가 있다면….
“각 나라를 이끄는 정상들 앞에서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더 즐겁게, 재미있게 잘하고 싶다. 한국인의 흥 같은 것들을 우리만의 스타일로 보여주자는, 그런 기대와 흥분 속에서 준비하고 있다. 공연이 펼쳐지는 갈라 만찬 준비가 제일 중요하다. ‘동궁과 월지’, 그러니까 예전에 안압지라고 불렸던 곳이 만찬 행사를 열기에 정말 좋은 곳인데 10월 말은 추위나 가을비 리스크가 있다. 안전하게 실내에서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경주박물관 마당에 만찬장을 짓고 있는 중이다.”
“‘오징어 게임’, ‘기생충’, ‘미나리’, 한강의 작품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 작품이 이제는 정말 많다. 영화는 물론 K팝과 뷰티, 패션, 음식 등까지 인기다. 이제는 공연 부문만 남았다고 했었는데 ‘어쩌면 해피엔딩’이 최근 그 서막을 열었다. 옛날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세계적인 인기다. 사실 평창 올림픽 준비를 할 때까지만 해도 싸이의 ‘강남스타일’ 정도를 빼고는 이렇게 유명한 게 없었다. BTS도 막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지금은 참 보여 줄 게 많아졌다. 무엇을 골라서 보여 줘야 할지 모를 정도여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20년 전 부산 APEC과는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준비하고 있나.
“부산 APEC은 해외 정상들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찍었던 사진이 기억나는, 당시 한국에서 정말로 큰 행사였다. 그래도 2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기에는 갭이 좀 크다. 이제는 세계 정상들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 문화와 예술과 음식 같은 것을 직간접으로 겪어보셨기 때문에 그때와는 달라야 한다. 무엇보다 IT가 크게 발전했다. 부산 APEC이 좀 더 전통적이면서 아날로그적인, 클래식한 문화 예술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훨씬 더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것들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APEC 연출 사례들도 참고하나.
“물론이다. 인도네시아 것도 좋았고 중국, 페루 등 거의 모든 나라의 전례들을 참고용으로 훑었다. 결국은 각국의 전통을 기반으로 표현을 해낸 것들이다. 예술과 문화는 그 나라의 아이덴티티니까. 전통을 베이스로 우리만의 분위기와 느낌을 찾아 표현할 것이다. 문화는 디테일이기도 하다.”
양 감독은 연극계에서 ‘셰익스피어 스페셜리스트’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셰익스피어 연극 공연을 많이 해왔다. 해외 투어 공연에 나섰던 ‘한여름 밤의 꿈’, 배우 황정민과 함께 했던 ‘맥베스’ 등은 모두 셰익스피어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에 관심이 많은 이유가 있나.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막장 드라마 작가라는 점이다(웃음). 주인공이 친척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고…. 인간의 어두운 본성, 갈등과 질투와 배신과 유머, 심지어 요정이 등장하는 판타지까지 모든 게 다 있다. 사람이 겪는 모든 드라마틱한 상황들을 문학적인 수사로, 아름다운 대사의 향연과 함께 깊이 있는 철학적 메시지로 전달한다. 공연 연습을 하다 그의 영혼을 만난 듯한 황홀감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셰익스피어의 37개 작품을 모두 공연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현재까지 10개 정도밖에 못 했지만.”
―연출의 무대를 고전 작품에서 올림픽 개회식이나 APEC 같은 행사로 넓히는 이유가 있나. 이벤트 무대의 매력은 뭐라고 느끼나.
“공연하는 자와 즐기는 자가 함께 있는 곳이 무대다. 큰 무대, 작은 무대가 따로 없다. 어렸을 때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면서 알래스카와 남미 안데스 문명의 사원, 아프리카 초원 같은 곳을 꿈꿨다. 연극을 할 땐 전 세계를 돌면서 다른 문화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함께하는 예술을 꿈꿨다. 처음 만들었던 극단 이름이 ‘여행자’였다. 10년 동안 집시처럼 돌아다니면서 해외 공연 투어를 했다. 그렇게 해외에 한국 문화와 예술을 알리고 싶었다. 평창 올림픽이나 APEC 행사는 그런 꿈의 연장선상에 있다.”
양정웅 APEC 예술총괄감독 |
△1968년 서울 출생 △1992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7년 극단 ‘여행자’ 창단 △2012년 베세토연극제 한국 대표(위원장) △2015∼2020년 서울예대 공연학부 교수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 총연출 △2024년 강원 겨울청소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제15회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 대상(2003년), 폴란드 그단스크 셰익스피어 페스티벌 대상·관객상(2006년),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연출상(2009년), 대한민국 한류 대상(2013년), 체육훈장 맹호장(2018년) |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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