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열린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남아공 백인 농부 집단 학살’ 의혹을 거론하며 해명을 요구했다. 통상적 외교 관행에서 벗어난 ‘결례’를 범하며 외국 정상을 공개적으로 모욕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몰아붙이며 백악관에서 내쫓다시피 한 데 이어 또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간 외국 정상들의 백악관 방문은 자국 내 정치적 입지를 다질 기회였지만 트럼프 2기엔 오히려 공개 망신을 당할 무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무역 협상 왔다가 ‘음모론’에 봉변
트럼프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라마포사 대통령을 만나 남아공에서 백인 농부를 겨냥한 ‘집단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백인 사망자들이 있다. 대부분 백인 농부”라며 남아공의 높은 범죄율 속에서도 백인들이 불균형적으로 희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도중 참모에게 관련 영상을 상영하라고 지시했다. 집무실에는 평소 TV가 설치돼 있지 않지만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설치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전에 치밀하게 영상까지 준비한 것이다. 영상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 농부 1000명이 묻힌 묘지’라고 주장한 흰색 십자가들과 한 남아공 정치인이 “농부를 죽이자”고 외치는 장면이 담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련 기사들을 출력한 문서 뭉치도 라마포사 대통령에게 직접 보여줬다. 백악관은 회담 직후 SNS 공식 계정에 이 영상을 ‘조금 전 집무실에서 선보였던 영상: 남아공의 박해 증거’라는 제목으로 게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아공 정부가 백인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1월 남아공 의회는 공익을 목적으로 사유지를 몰수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토지수용법을 통과시켰다. 남아공 최대 농민단체는 해당 법이 시행된 이후 실제로 몰수된 사례는 없다고 밝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 법이 백인 농부를 겨냥한 차별적 조치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날 회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라마포사 대통령)은 그들이 땅을 빼앗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그들이 땅을 빼앗은 뒤에는 백인 농부를 죽인다”며 “백인 농부를 살해해도 그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미국의 30% 상호관세 부과에 대응해 이번 회담에서 양국 간 교역 및 투자 확대를 주요 의제로 삼을 계획이었지만, 대화는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크라이나와 같은 패턴…대처는 달랐다
이날 회담은 2월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회담을 연상시켰다. 당시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갑작스러운 의제 제기와 공세적 태도로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엔 영상과 문서를 사전에 갖추는 등 더 준비된 공격 성격이 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TV 카메라가 돌아가는 와중에 라마포사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몰아붙인 것은 보수 지지층을 의식한 ‘국내용’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회담이 ‘리얼리티쇼’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TV쇼 ‘어프렌티스’ 진행자로 존재감을 키운 트럼프 대통령이 극적 연출로 주목을 끌어내는 전략을 외교 무대에까지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 매체 액시오스는 “트럼프 대통령 집무실은 세계 지도자에게 위험 구역이 됐다”며 “트럼프 2.0 체제에서 백악관 방문은 자칫하면 공개 망신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도전이 됐다”고 전했다.
다만 젤렌스키 대통령이 격한 설전을 벌인 것과 달리 라마포사 대통령은 회담 내내 침착함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이 문제를 대화로 풀 준비가 돼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을 일단 진정시키면서도 그의 주장에 단호히 반박했다. 그는 “남아공에 범죄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도 사실이지만 범죄 피해자는 백인만이 아니다. 대부분 흑인”이라고 말했다. 이어 “영상 속 과격한 발언은 정부 정책과 무관한 소수 정당 관계자의 주장일 뿐”이라며 “누구도 토지를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임다연 기자 allo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