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양환]서울국제도서전이 남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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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문화부장

정양환 문화부장
많은 이들이 월드컵 참사로 분개 혹은 절망하는 이때. 무슨 얘기도 마뜩잖게 들리겠지만, 어딘가에선 다행이다 싶은 소식도 조금씩 피어난다. 문화계는 지난달 28일 성황리에 막을 내린 ‘2026 서울국제도서전’이 그랬다.

강남 코엑스에서 닷새 동안 열린 도서전은 뜨겁다 못해 폭발했다.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이었고, 전시장은 아침 일찍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무려 16만 명이 넘게 몰린 역대급 풍작. MZ세대를 중심으로 ‘텍스트힙(Text Hip·독서를 멋지게 여기는 문화)’ 열풍이 불고 있음을 실감케 해준 현장이었다.

도쿄와 베이징의 국제도서전

이웃 나라들을 살펴보면, 서울도서전의 인기는 결코 ‘새 발의 피’ 정도로 치부할 성취가 아니다. 1993년 시작된 일본 ‘도쿄국제도서전’을 봐도 알 수 있다. 한때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도쿄도서전은 2016년을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영국 런던 북페어(Book Fair) 등과 함께 ‘세계 4대 도서전’으로 꼽혔던 과거를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크다.

도쿄도서전의 침몰 원인은 명확하다. 지나친 상업화였다. 너무 잘 되다 보니 출판사들에 폭리 수준의 참가비를 요구했다. 결국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대형출판사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며 위상을 잃어 갔다.

더 치명적인 건 물정에 둔감했다는 점이다. 웹툰과 웹소설이 급성장하고 스마트폰이 세상을 뒤엎는데, 도쿄도서전은 ‘종이책’이란 아날로그 성채만 지키려 했다. 자국에서도 “독자 취향이나 관심을 반영하지 않다가 대중과 기업 모두에게 외면받았다”(NHK방송)는 힐난이 나왔다.

일본이 주춤하는 사이, 세계 4대 도서전 타이틀은 중국 ‘베이징국제도서전’이 가져가는 모양새다. 1986년 닻을 올린 베이징도서전은 원래 정부 입김이 센 데다 자국중심주의도 강해 매력이 떨어진단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종이책을 넘어 웹소설·웹툰, 숏폼, 게임 등을 포괄하는 ‘디지털 IP(지식재산권) 비즈니스 허브’로 체질을 개선했다. 올해는 인공지능(AI)을 출판산업에 어떻게 이식할지를 논하는 전시도 마련했다. 이런 노력 덕에 베이징도서전은 규모로 따지자면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이어 세계 2위로 급성장했다.

그럼 서울도서전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다행히 도쿄처럼 상업주의의 늪에 빠지지도, 베이징처럼 기술과 외양에 치중하지도 않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반짝 인기에 안주했다간 이 열기는 금세 식을 수 있다.실제로 불안 요소가 없는 게 아니다. 오픈 런으로 몰려든 방문객은 상당수가 책보단 ‘한정판 굿즈’에 더 관심을 보였다. 공간 부족을 이유로 일부 출판사들이 밀려났는데, 출판과 무관한 기업 부스가 적지 않았다. 정부 지원 중단 뒤 어쩔 수 없는 자구 노력인 건 이해한다. 하지만 “정작 출판계 종사자의 권리나 현안을 논의하는 장은 축소됐다”는 한국작가회의의 지적은 되새겨 봄 직하다.

서울도서전 열기 이어가려면

올해 서울도서전이 내건 주제는 ‘인간 선언: 호모 두두리(Homo duduri)’였다. 두두리(豆豆里)는 우리 신화나 민담에 나오는 도깨비 혹은 두드리는 사람(대장장이)의 원형이라고 한다. AI가 ‘딸깍 출판’으로 책을 마구 찍어내는 시대에, 오히려 “다시 고민하고 다시 질문을 던지는 인간”이란 묵직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 출판사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13.4%나 줄었을 정도로 현실은 험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 중요한 건, 수십만 명이 몰려든 축제의 열기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이어 가느냐가 아닐까. 진정 위 질문에 답할 두두리는 도서전에 온 독자들이 아니라 출판계와 정부여야 한다. 헛되이 시간을 보냈다간 32강 탈락의 비애를 맛본다는 걸 뼈저리게 배우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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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문화부장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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