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칸] 미드나잇 좀비 영화에 우리는 순식간 '군체'가 됐다

1 week ago 6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초청작 <군체>의 연상호 감독과 배우들이 레드카펫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초청작 <군체>의 연상호 감독과 배우들이 레드카펫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영화제의 묘미는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영화와 관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순간에 있다. 이미 완성된 영화인데도 라이브 공연처럼 느껴지는 순간 말이다. 장르영화의 경우는 한층 더 특별하다.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은 감독의 세계와 장르의 문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감독이 숨겨놓은 타란티노식 농담과 히치콕식 변주를 금세 알아챈다. 어디서 긴장해야 하고,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를 비슷한 감각으로 공유한다. 그래서 영화제에서 보는 장르영화는 대개 더 시끄럽고, 더 과장되고, 더 뜨겁다.

칸 영화제의 미드나잇 스크리닝은 그 분위기가 유독 강하다. 자정이라는 시간부터 이미 조금 비현실적이다. 그 시간까지 극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같은 기대를 품고 있다. 뭔가를 “좋게 평가”하기보다, 한바탕 함께 휘말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함께 탄 사람들처럼, 놀람도 웃음도 마음껏 드러낸다. 낮 상영에서는 조용히 지나갔을 장면에도 과감히 박수가 터지기도 한다.

관객은 잠시 연대한다. 국적도 직업도 잊은 채 낯선 사람들끼리 모여 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고, 동시에 몸을 움찔한다. 터너가 말한 커뮤니타스(communitas)라는 감각도 아마 이런 데 가까웠을 것이다. 영화 한 편이 끝날 때까지만 잠깐 생겼다가 사라지는 공동체.

흥미로운 것은 좀비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원래 이런 집단 반응과 유난히 밀접하다는 점이다. 좀비 영화의 공포는 단지 괴물의 형상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가 감염되고, 군중이 무너지고, 사회 전체가 한 방향으로 휩쓸리는 과정을 바라보는 데서 생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극장 안의 관객 역시 쉽게 하나의 군중이 된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면 객석 전체의 긴장이 순식간에 번지고, 한 번 터진 웃음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연상호의 좀비 영화는 영화제라는 축제 공간에 적격이다.

<부산행>이 폐쇄된 열차 안에서 감염의 속도를 밀어붙였다면, <반도>는 붕괴 이후의 공간 전체를 전면화했다. 그리고 이번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신작 <군체>는 그 흐름을 다시 한번 변주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는 개별 인간보다 집단 자체의 움직임에 더 강한 관심을 보인다. 연상호 감독은 이번에도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모방하고, 두려움이 어떤 속도로 퍼져나가며, 공동체가 어떻게 순식간에 광기로 기울어지는지를 탐구한다.

영화 <군체>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군체>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연상호 감독은 오래전부터 이런 집단의 분위기를 집요하게 그려온 사람이다. 그의 영화에는 늘 빠져나가기 어려운 공간이 나온다. <돼지의 왕>의 학교, <부산행>의 열차. 공간은 닫혀 있고 사람들은 서로를 오래 바라봐야 한다. 그 안에서 연대와 균열이 반복된다. 누군가는 남을 밀어내고, 누군가는 끝까지 남는다.

그래서 영화에서 좀비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생존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하는 일들이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붙어 있다가도,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모른 체 해야 하는 순간들. 그래서 좀비 영화는 오래 반복돼도 쉽게 낡지 않는다. 괴물 자체보다 그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반응이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체>라는 제목은 묘하다. 무리 군(群), 몸 체(體).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데 하나처럼 움직이는 상태를 뜻한다. 뜻을 공유하는 연대라기에는 지나치게 맹목적이고, 내부 균열의 가능성조차 허락하지 않는 집합이다. 연상호 감독의 말대로 이 특이한 군체는 오늘날 AI 기술로 발현되는 집단지성과 보편성의 총합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영화가 그리는 보편성은 익숙한 인간 공동체의 이미지와는 꽤 다르다. 원래 보편이라는 말에는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하고 연결한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하지만 <군체> 안에서 보편성은 차이를 지워버리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같은 정보와 감각을 공유한다. 그런데 바로 그 연결 때문에 아무도 망설이지 않는다. 의심도 충돌도 사라지고 하나의 반응만 남아 있다.

연상호 감독은 오래전부터 집단 안에서 사라지는 개인의 문제를 반복해서 다뤄왔다. 그런데 <군체>에서는 그 압박이 훨씬 현대적인 형태로 변한다. 과거의 군중이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갇혀 있었다면, 여기의 군체는 네트워크처럼 연결된다. 서로를 끊임없이 참조하고 복제하면서 하나의 감각으로 수렴한다.

오늘날 온라인 공간의 분위기와도 닮았다. 알고리즘은 가장 평균적인 반응과 가장 빠른 합의를 증폭시키고, AI 기술 역시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장 보편적인 답변을 생성한다. 효율적이고 매끄럽다. 대신 인간 특유의 느린 판단과 어긋남도 함께 사라진다.

영화 <군체>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군체> 스틸컷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그래서 이 영화의 공포는 감염의 이미지보다 동조의 이미지에 가까워 보인다. 아무도 자기만의 속도로 생각하지 않는 상태. 얼굴은 여럿인데 감정은 하나처럼 움직이고,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데도 개별 인간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진 사회다. <군체>가 끝내 섬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래의 디스토피아라기보다 이미 익숙해진 풍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 위의 사람들이 동시에 함성을 지르는 모습이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고 어찌 보면 기괴한 것처럼, 미드나잇 스크리닝에서 <군체>를 본다는 것은 조금은 이질적인 경험이다. 스크린 안에서는 개별성을 잃은 존재들이 움직이고, 객석 안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같은 타이밍에 웃고 놀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극장 전체의 호흡이 잠깐 비슷해진다. 옆자리 사람의 웃음에 같이 웃게 되고, 객석 뒤편에서 터진 비명에 덩달아 긴장하게 된다.

그러면서 순간 흠칫 놀란다. 저 좀비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와 너무 닮은 것 같아서다. 영화에서 진화(혹은 업데이트)되는 군체를 바라보며 생존자들이 말한다. “우리를 따라 하고 있어.” 그러자 이 대목에서 객석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린다. 어쩌면 그 말은 우리 객석 공동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저 스크린 위의 좀비들이 우리 객석을 따라 하고 있어.

축제란 원래 공동체 안에 쌓인 긴장과 불안을 잠시 바깥으로 끌어내는 시간이다. 인류학자 빅터 터너의 말처럼 축제와 의례의 순간에는 평소의 역할과 위계가 잠시 느슨해진다. 사람들은 함께 웃고 소리 지르고 과장된 감정을 공유한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개인 안에 고립되지 않고 집단 속에서 순환한다는 점이다. 두려움과 흥분은 서로에게 전염되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는 자기 안의 긴장을 잠시 해소한다.

그런 면에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의 상영이 해석과 평가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미드나잇 스크리닝은 오히려 축제의 본분에 충실한 시간이다. 미드나잇의 관객은 영화를 분석하기 전에 먼저 몸으로 받아들인다. 비명이든 웃음이든 참지 않고 터뜨리면서 쌓이고 억눌린 감각을 밖으로 배출시킨다.

이 지점에서 미드나잇 스크리닝은 조르주 바타유가 말했던 ‘과잉의 소모(dépense)’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은 늘 효율과 질서 속에서만 살아가지 않으며, 때로는 남는 감정과 에너지, 흥분을 낭비하듯 분출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축제와 놀이, 광기와 열광은 바로 그런 배출의 형식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장르영화는 단순한 상영으로 끝나지 않는다.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과 비명, 박수와 탄식까지 포함해 하나의 집단 체험으로 완성된다.

사진 출처. unsplash

사진 출처. unsplash

그 점에서 <군체>를 미드나잇 스크리닝으로 본다는 경험은 제의에서 일어나는 완벽한 전환이다. 영화는 집단 속에서 사라지는 개인의 공포를 그리는데, 관객은 그 장면들을 낯선 사람들과 함께 웃고 즐기며 소비한다. 스크린 안에서는 군중이 광기로 치닫고 있지만, 객석에서는 그 불안을 오락으로 소비한다. 비명은 웃음으로 이어지고, 긴장은 박수로 배출된다. 어쩌면 축제란 원래 이런 기능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스스로 두려워하는 감정을 안전한 형태로 재현하고, 함께 체험하며, 끝내 웃음과 열광 속에서 흘려보내는 것. 그런 의미에서 칸의 미드나잇 스크리닝은 현대 사회가 자기 불안을 소비하는 거대한 집단 의례인 것이다.

연상호에게 좀비는 장르적 선택이기 이전에 사회적 언어다. 한국 사회에서 집단은 늘 양가적이었다.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면서 동시에 개인을 지워버리는 압력이기도 했다. 그가 <부산행> 이후에도 계속 이 장르로 돌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좀비만큼 그 양가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형식은 드물기 때문이다. <군체>는 묻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정말 저 떼인지, 아니면 저 떼가 드러내는 우리 자신의 어떤 속성인지.

칸=김은진 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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