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스타in 김보영 기자] 초심으로 귀환한 연상호 감독이 한국 영화의 얼굴들과 함께 완성한 태초의 ‘연니버스’. 영광의 시대 이면의 폭력의 ‘얼굴’을 예리하게 포착한 연상호표 사회고발 미스터리. 이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기억해야 할 진짜 얼굴은 무엇인가,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영화 ‘얼굴’(감독 연상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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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살아있는 기적이라 불리는 시각장애인 전각 장인 임영규(권해효, 박정민 분)의 아들 임동환(박정민 분)이, 40년 전 실종된 줄 알았던 어머니의 백골 시신 발견 후, 그 죽음 뒤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린다.
‘얼굴’은 연상호 감독이 제작비 2억 원의 저예산으로 박정민, 권해효, 신현빈 등 배우들과 신의와 의리로 의기투합한 영화로 연상호가 직접 쓴 그래픽 노블 원작을 영화로 각색했다. 박정민과 권해효의 세대를 넘나든 2인 1역 열연, 박정민의 1인 2역 열연으로 개봉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얼굴’은 태생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아름다운 글씨로 도장을 새기는 전각 장인 임영규란 인물의 과거, 그의 아내이자 아들 임동환의 어머니였던 정영희란 여자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와 진실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초상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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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규는 보이지 않는 눈 대신 누구보다 섬세한 손끝으로 오랜 세월 세상에서 아름다운 도장을 새겨와 미디어로부터 ‘살아있는 기적’이란 수식어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장을 만든 것은 물론, 홀아비로 비장애인인 아들 임동환을 어엿하게 길러낸 개인사로도 주목받고 있다.
아들 임동환은 기억도 없을 갓난 아이 시절 어머니가 집을 나간 탓에 어머니 얼굴도 모른 채 아버지인 임동규 손에서 길러졌다. 조금은 무뚝뚝해도 임동규와 유정한 부자관계를 유지하던 임동환의 일상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40년 전 백골 사체를 발견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으며 균열이 생긴다. 때마침 아버지 임동규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이던 PD 김수진(한지현 분)이 이를 포착하고, 김수진은 어쩌면 임동규보다 정영희의 죽음을 취재하는 게 더 특종이 될 수 있겠다는 직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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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임동환은 취재를 명목으로 당연하듯 아버지와 자신의 가정사에 개입하려는 김수진의 공격적 태도가 불편해도 겉으론 싫은 소리 한 번 못 할 만큼 체면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임동규 역시 직업에 대한 질문엔 대답을 잘 하지만, ‘어떻게 아들을 길러냈냐’는 개인적 질문엔 말을 아낀다. 김수진은 ‘임동환 가족을 위한 일이자 취재자로서의 의무’라는 명분을 방패 삼아 임동환이 요구하지도 않은 정영희의 과거에 접근해나간다. 그렇게 파악된 정영희란 인물에 대한 단서는 아버지 임동규의 ‘청풍전각’과 같은 이름을 가진 ‘청풍피복’이란 의류공장에서 일하던 여급이었다는 것, 누구보다 고운 심성을 지녔지만 모두가 경악할 만큼 추한 외모를 지녔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임동환은 김수진의 행보, 정영희가 못생긴 여자였다는 이유로 멸시하는 듯한 전 직장동료들의 태도에 모욕감과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아버지도 알려주지 않았던 모친 정영희의 과거와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과 의문에 김수진의 취재를 말리지 못한 채 불편한 동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조금씩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애써 평온과 예의를 유지하던 임동환의 감정선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무너져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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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가 살았던 시절의 배경은 1970년대로, 전쟁 직후 최빈국 수준에 가까웠던 한국이 단기간에 선진국에 가까운 가파른 성장을 이뤄 ‘한강의 기적’이란 수식어로 불렸던 시대다. 누군가에겐 이 시절은 성취와 영광의 시대였다. 반면 추하다 손가락질 받고, 장애인이라 무시받던 정영희와 임영규에게 당시의 시대는 폭력에 가까웠다.
영화 ‘얼굴’은 ‘살아있는 기적’이라 불린 임동규란 인물과 ‘지워진 얼굴’인 정영희란 인물의 대비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던 대한민국의 아픈 근현대사를 건드린다. 대한민국 고속 성장의 역사에 가려 조명되지 못한 어두운 실패와 폭력을 정교하면서도 날카롭게 드러낸다. 정영희와 임동규의 과거를 끝내 마주한 김수진, 임동환의 태도는 현재를 사는 관객과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대변한다.
이 영화가 시대에 던진 예리한 질문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우리 개인을 향한 질문이 돼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얼굴은 없는지, 그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젊은 시절의 임동규, 아들 임동환 1인 2역을 동시에 소화하며 1970년대의 ‘얼굴’과 2025년 현재의 ‘얼굴’의 변화를 연결성 있게 표현해낸 박정민의 열연이 작품에 강한 몰입감을 부여한다. 박정민이 표현한 젊은 시절 임동규의 표정과 세월을 녹여내면서도, 노년 임동규만의 모습을 자연스레 녹여 세대 간 대비를 극대화한 권해효의 열연이 화룡점정이 되어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 한 번 드러내지 않고 정영희란 인물을 연기하며 시대의 아픔을 그린 신현빈의 도전 역시 설득력있고 인상적이다. 이밖에 임성재, 한지현 등 다른 배우들의 열연도 장면의 빈틈을 빼곡히 메우며 이 영화의 이목구비를 풍성히 채운다.
‘사이비’, ‘돼지의 왕’ 등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연상호 감독의 초기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반가운 영화다. 연상호 감독 전작들이 보여줬던 투박하고 강렬한 톤과 사뭇 다른 전개, 연출 톤도 인상적이다. 한정된 예산과 러닝타임에 무거운 질문을 알차게 눌러 담은 반가운 작품이다.
11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