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위해 읽어주던 그림책, 내가 되려 힐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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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고 있다. [송경은 기자]

한 여성이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고 있다. [송경은 기자]

오직 아이를 위해 그림책을 펼친다면 그 시간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어달라고 할 때가 많고, 어떤 책은 글밥이 너무 많거나 등장인물이 많아 소리 내 읽어 주면서 숨이 차기도 한다. 그런데 그림책이 부모인 나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우선 그림책은 성인의 정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또 다양한 상황에 놓인 주인공 아이에게 몰입하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의 마음을 읽어 주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림책이 어른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는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일례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뇌과학 연구에서는 삽화가 있는 이야기 읽기가 감각·공감 관련 뇌 네트워크를 실제 경험처럼 활성화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그림책 역시 짧은 서사와 이미지, 감정 표현을 통해 성인의 정서 안정과 감정 이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림책은 짧은 문장과 이미지 중심 구성 덕분에 독서 자체에 대한 진입 장벽이 낮고, 감정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일본독서협회저널에 지난 2015년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림책을 읽는 동안 뇌의 전전두엽 혈류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근적외선 뇌영상기법(NIRS)으로 성인의 뇌를 촬영한 결과로, 긴장 완화와 안정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림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회복 효과를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림책은 ‘감정을 안전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자신의 감정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일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림책 속 등장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감정을 만나면 훨씬 부담이 적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사’라고 설명한다. 이야기 속 인물에게 자신의 감정을 비춰보며 자연스럽게 감정을 인식하고 정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림책은 압축된 감정을 다루는 데 강점이 있다. 짧은 분량 안에 상실, 외로움, 성장, 불안, 사랑 같은 감정을 응축해 담아낸다.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이 원작인 애니메이션 영화 ‘알사탕’의 한 장면. 전 세대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로 지난해 5월 개봉해 누적 관객 13만명을 기록했다. [롯데컬처웍스]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이 원작인 애니메이션 영화 ‘알사탕’의 한 장면. 전 세대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로 지난해 5월 개봉해 누적 관객 13만명을 기록했다. [롯데컬처웍스]

육아 중인 부모에게 그림책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시간은 단순히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아니라 부모 역시 잠시 감정 속도를 늦추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온종일 스마트폰 알림과 집안일, 업무에 시달리다 그림책 한 권을 펼치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멈춘다. 아이는 그림을 보고, 부모는 그 그림 사이에 담긴 서사를 읽는다. 학창 시절 배우곤 잊어버렸던 상식을 새삼 되새기거나 알아두면 쓸모 있는 세상의 이모저모를 알게 되는 것은 덤이다.

무엇보다 그림책은 부모에게 아이의 세계를 이해할 기회를 준다. 어른들은 이미 익숙해진 세상을 아이들은 처음 경험한다. 비가 오는 것도, 친구와 싸우는 것도, 혼나는 것도 모두 낯설고 거대한 사건이다. 그림책은 그 감정을 아이 눈높이로 번역해 보여준다. 부모는 책을 읽으며 ‘아, 아이는 이런 순간을 이렇게 느끼는구나’를 배우게 된다.

반대로 아이 역시 부모의 감정을 읽는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부모가 어떤 장면에서 웃고, 멈추고, 슬퍼하는지를 보며 감정을 배운다. 그래서 그림책 읽기는 단순한 언어 교육이 아니라 감정을 주고받는 경험에 가깝다. 그래서 그림책을 읽을 때 지나치게 교육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고 서로 느낀 점을 가볍게 이야기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넌 어떤 장면이 제일 좋았어?” “이 친구는 왜 울었을까?” 같은 질문만으로도 아이와 어른 사이에는 풍부한 대화가 만들어진다.

최근 국내에서도 그림책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다. 그림책 특유의 따뜻한 감성이 일상에 지친 어른들에게 정서적 위로를 건네는 한편, 전 세대에 걸쳐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도서관이 지난 2024년 5월부터 2025년 4월까지 전국 1540개 공공도서관의 그림책 대출 현황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 기간에 그림책 대출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2% 증가했는데 특히 40~60대 성인층의 대출이 26.9% 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왼쪽부터 리디아 브란코비치의 그림책 ‘감정 호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자그맣고 커다란 고릴라’,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알사탕’. 성인들에게도 꾸준히 읽히는 책들이다. [책읽는곰·웅진주니어·스토리보울]

왼쪽부터 리디아 브란코비치의 그림책 ‘감정 호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자그맣고 커다란 고릴라’,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알사탕’. 성인들에게도 꾸준히 읽히는 책들이다. [책읽는곰·웅진주니어·스토리보울]

특히 리디아 브란코비치의 그림책 ‘감정 호텔’은 20대 이상 성인 독자층에서 높은 대출 순위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책은 슬픔과 분노, 불안 등 날마다 다른 감정이 머물다 가는 한 호텔과 이들 감정을 정성껏 보살피는 지배인의 이야기다. ‘감정 호텔’은 지난 2024년 2월 출간 직후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인터넷서점 예스24가 어른도 읽기 좋은 그림책들을 모아 놓은 ‘100세 그림책’ 섹션에서는 현재까지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처럼 그림책이 성인 독자층까지 사로잡게 된 데는 그림책 콘텐츠가 전시,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확장된 영향도 크다. 지난해 5월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알사탕’은 백희나 작가가 쓴 동명의 그림책이 원작으로, 어른도 울고 웃게 만드는 이야기 덕분에 2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과 극장가 불황에도 누적 관객 수 13만명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았다. 그림책 ‘알사탕’은 주인공 동동이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의 속마음을 들려주는 마법의 알사탕을 손에 넣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알사탕’을 비롯한 ‘달샤베트’ ‘장수탕 선녀님’ 등 백희나 작가의 주요 그림책들은 가족 뮤지컬로도 전국을 순회하며 꾸준히 관객과 만나고 있다. ‘달샤베트’는 무더운 여름날 밤 보름달이 녹아내리고, 늑대 주민이 사는 아파트가 정전되는 가운데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 14년간 스테디셀러로 인기를 누려온 ‘장수탕 선녀님’은 동네 오래된 목욕탕, 장수탕에서 만난 덕지와 선녀 할머니의 특별하고 마법 같은 이야기를 그린다.

지난해 5월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은 지난해 주요 작품을 전시로 펼친 ‘앤서니 브라운 展: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도 남녀노소 관객들로부터 두루 호평받았다. 전시기획사 아트센터이다에 따르면,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는 5개월간 누적 관객 10만명을 동원했다. 오는 6월 19일에는 울산 동구 HD아트센터 미술관에서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 아빠가 최고야’ 전시가 개막한다.

지난해 5월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원화를 펼친 기획 전시가 열린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경. 어른 관람객들이 그림책 삽화를 살펴보고 있다. [아트센터이다]

지난해 5월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원화를 펼친 기획 전시가 열린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경. 어른 관람객들이 그림책 삽화를 살펴보고 있다. [아트센터이다]

그동안 50여 권의 그림책을 선보인 브라운은 “그림책은 나이를 먹었다고 접어야 할 책이 아니라 나이를 불문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자그맣고 커다란 고릴라’ ‘미술관에 간 윌리’ ‘돼지책’ 등이 꼽힌다. 대부분 스테디셀러다. 이처럼 그림책을 기반으로 한 체험형 콘텐츠는 독후활동으로도 제격이다.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생각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고, 그림책에 실린 그림들을 원화로 만나면서 더욱 깊이 있게 작품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도 읽는 그림책들의 공통점은 가족, 인간애, 행복, 상상, 꿈 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출판사 창비가 지난 2024년 신설한 ‘창비그림책상’의 첫 수상작인 이경아 작가의 ‘아빠, 나의 바다’는 딸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버지의 이야기로 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이 작가는 “인생의 반을 물 위에서 산 아빠가 들려준 바다 이야기 덕분에 어린 나는 미지의 세상을 꿈꾸게 됐다”고 밝혔다.

처음부터 어른 독자까지 염두에 두고 쓰여진 그림책도 상당하다. 출판사 웅진주니어는 ‘웅진 모두의 그림책’ 시리즈를 통해 0세부터 100세까지 모두 함께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일례로 ‘시계탕’은 “10분 내로 준비해” “3분 있다 불 끄는 거야” 등 늘 시간을 강조하다 어느 날 번아웃이 와 시계로 변해버린 엄마와 다시 엄마를 되찾으려는 어린 딸의 이야기로 많은 육아맘들의 공감을 일으켰다.

벨기에 작가 안 에르보의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는 그림책이지만 유아 도서보다는 이별을 앞둔 연인의 이야기를 담은, 사랑에 관한 에세이에 가깝다. 드로잉·콜라주가 뒤섞인 그림으로 작가는 사랑으로 촉발되는 다양한 감각을 시각화했다. 이들 이미지는 시적인 문장과 함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랑의 다양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면서 몰입감을 높여 준다.

왼쪽부터 이경아 작가의 그림책 ‘아빠, 나의 바다’,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 ‘시계탕’, 벨기에 작가 안 에르보의 그림책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 그림책은 부모와 아이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를 준다. [창비·웅진주니어·봄날의책]

왼쪽부터 이경아 작가의 그림책 ‘아빠, 나의 바다’,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 ‘시계탕’, 벨기에 작가 안 에르보의 그림책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 그림책은 부모와 아이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를 준다. [창비·웅진주니어·봄날의책]

<플러스 포인트>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는 시간은 부모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림책은 성인의 정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아이의 세계를, 아이가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독후활동으로 그림책을 전시, 영화, 뮤지컬 등으로 제작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책과 깊게 교감할 좋은 기회다

송경은

송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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