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법이 곧 신의 말씀?… 신자 되길 요구하는 정치를 거부하라[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1 week ago 3

〈103〉 신자인가 시민인가
권력자는 히잡 쓸지 말지를 결정… 복종 유도하려 종교적 권위 동원
딸들은 SNS로 저항의식 키워가
父 서있는 지반 쏴 체제 전복 노려

이란 여성들도 제각기다. 차도르를 입고 히잡 찬성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사진 출처 테헤란=AP 뉴시스

이란 여성들도 제각기다. 차도르를 입고 히잡 찬성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사진 출처 테헤란=AP 뉴시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이란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누가 봐도 정치적인 영화다. 2022년 이란의 한 여성이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의문사를 당했고, 그것을 계기로 시위가 폭발했다. 모하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이 시위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칸 영화제에 이 작품을 출품한 것을 계기로 정치적 망명을 택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그렇다면 이 영화의 초점은 히잡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히잡은 다면적인 상징이다. 히잡은 무슬림의 정체성을 표시하기도 하고, 여성 억압을 나타내기도 하고, 패션 아이템이기도 하다. 히잡을 기피하는 이란 여성도 있는 한편 히잡을 선호하는 이란 여성도 있다. 히잡을 둘러싼 금지의 역사도 복잡하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반드시 히잡을 써야 했지만 히잡 착용이 금지됐던 적도 있다. 1930년대 후반에는 히잡 금지법으로 인해 히잡을 쓴 여성들은 공공교통을 이용할 수조차 없었다.

이슬람 혁명 전인 1971년 이란 테헤란대 여성들의 모습. 히잡을 쓰지 않고 일부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 사진 출처 이란 외교부 ‘이란 왕의 땅’

이슬람 혁명 전인 1971년 이란 테헤란대 여성들의 모습. 히잡을 쓰지 않고 일부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 사진 출처 이란 외교부 ‘이란 왕의 땅’
그렇다면 관건은 히잡을 쓰고 말고 여부가 아니라 문화를 강제할지 여부다. 권력자는 상대가 자기 뜻에 복종하길 바란다. 그런데 누가 남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겠는가. 그래서 권력자들은 물리적 폭력을 통해 상대의 복종을 끌어내곤 한다. 사소한 폭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상대를 굴복시키려 든다. 그러나 폭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순 없다. 강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데도 체력 소모가 필요하고, 전쟁을 계속하는 데도 그 비용이 막대하다. 타고난 싸움꾼도 매일 싸우고 싶지는 않고, 최강의 국가도 매일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권력자는 이데올로기에 호소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의 궁극에는 종종 세속을 넘어선 신이 존재한다.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내 편이라고 믿게 할 수만 있다면 고생스럽게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강제할 필요가 없다. 나를 따르라! 신은 내 편이니까! 이 말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작은 비용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신정정치는 시작된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성립한 이슬람공화국은 그러한 현대판 신정정치의 대표 격이다. 이슬람 혁명의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는 신이 이슬람법의 유일한 입법자이자 주권자이기에, 정부는 이슬람법에 따라야 한다고 선포했다. 이슬람법은 곧 신의 명령이다. 이란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 아니라, 이슬람법을 해석하는 종교적 권위자인 최고지도자다. 이 최고지도자는 국민이 뽑지 않는데도 국민이 뽑는 대통령 위에 있다. 최고지도자는 대통령을 인준하기도 하고 해임하기도 한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등장하는 아버지 이만(믿음이라는 뜻)은 자수성가로 마침내 판사가 된 사람이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수사판사로 승진했건만 그의 마음은 무겁다. 정치범들의 사형을 언도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정부에 순응한 덕분에 가정은 유지된다. 그는 딸들에게 말한다. “우린 널 사랑으로 보살폈어. 집에 필요한 건 다 있고.” 그러나 갈등은 시간문제다. 아버지는 히잡 반대 시위자를 처벌하는 위치에 선 반면 딸들은 그 시위에 찬동하기 때문이다. 철저히 종교적인 집안에서 나고 자란 이 딸들은 어디서 새로운 생각과 정보를 얻게 됐을까. 신에게 도전하는 세속의 목소리는 소셜미디어와 휴대전화를 통해 왔다. 휴대전화로 촬영한 실제 시위 장면이 영화에 삽입되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효과를 주는 동시에, 정보의 새로운 유입 경로를 나타낸다.

이만은 딸들이 자신에게 시비하기보다는 복종하길 바란다. “아비인 나에게 조건을 걸어?” 자비로움과 복종이 가족관계의 본질이라고 믿는 아버지는 딸들의 반항을 견딜 수 없다. 결국 가부장은 폭주한다. 막내딸은 아버지의 총을 훔치고, 아버지는 모녀를 감금한다. 아버지와 딸의 갈등은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 결과는 영화 제목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이미 말하고 있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 포스터.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 포스터.
영화 제목에서 나오는 신성한 나무는 인도보리수를 지칭한다. 이 나무는 특이하다. 숙주가 되는 나무에 씨앗이 떨어져 자라다가 결국 그 숙주나무를 감싸 질식시키고 자신이 주인이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 가부장제, 신정정치체제는 숙주나무이고, 그에 저항하는 딸이 씨앗이 아닐까. 인도보리수 씨앗이 숙주나무를 죽이듯, 영화에서 가장 어린 막내딸이 아버지를 쓰러뜨린다. 아버지의 총을 훔쳐 아버지가 서 있는 땅을 쏘자, 땅이 무너지면서 아버지는 추락한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그 상태에서 영화는 끝난다.

막내딸은 왜 아버지를 직접 쏘지 않고 아버지가 서 있는 지반을 쏘았을까. 딸이 쏘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라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아버지가 서 있는 체제가 아니었을까.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아버지의 법은 곧 국법이요, 국법은 곧 신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 이데올로기 자체를 쏘았다. 변화 대신 불변을 옹호하고, 협상 대신 믿음을 강조하고, 토론 대신 복종을 강요하고, 시민 대신 신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신정정치를 쏘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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