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짝도 아니고 세 발짝 반, 시선은 45도로 틀어서. '고도를 기다리며' 연출 노트에는 이렇게 동선과 시선까지 명료하게 규정돼 있어요. '우리가 고도에 꽁꽁 묶여 있는 건 아닐까'라는 대사처럼 우리가 임영웅 선생님에게 꽁꽁 묶여 있는 거죠."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소극장 산울림.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개막을 이틀 앞두고 열린 프레스콜에서 '블라디미르(디디)' 역을 맡은 배우 이호성은 이번 공연의 원 연출자인 고(故) 임영웅 연출의 스타일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한국 연극계 대부' 임영웅의 섬세한 연출 방식을 그대로 녹인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오는 10일 다시 무대에 오른다. 지난해 5월 별세한 임 연출의 1주기와 소극장 산울림의 개관 40주년을 맞아서다. 2019년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이후 6년 만이다. 이번 공연은 임 연출이 사재를 털어 1985년 개관한 소극장 산울림에서 열린다.
임 연출은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를 국내에서 처음 무대화한 연극계의 거장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라는 두 방랑자가 실체가 없는 인물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내용. 이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왜 기다리고 있는지, 실제로 오는지조차 불확실한 상태에서 의미 없는 대화와 행동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다. 인생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함의 연속이란 점을 드러내는 부조리극의 대표작이다. 1969년 국내 초연 일주일 전에는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입석 예약 표까지 매진됐다.
이번 공연은 조연출로서 임 연출과 함께 작업한 심재찬이 연출을 맡았다. 그는 "배우들의 시선까지 세심하게 지시하는 '자로 잰 듯한' 임 선생님의 연출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했다"며 "고고와 디디가 흐트러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유롭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점은 어떤 면에서 진화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임 연출과 호흡을 맞춰온 배우들도 무대에 오른다. 1994년 공연을 시작으로 10회 이상 공연에 참여한 배우 이호성은 "'고도를 기다리며'는 베케트가 절 계몽시켰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제 인생의 가치관을 바꿔놓은 작품"이라며 "난해하지만 공부할수록 새롭고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그는 이 작품을 "피카소의 그림"으로 비유했다. "'고도'는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명작입니다. 옛날에 외국에선 교도소에서 이 작품을 공연한 적이 있대요. 그때 공연이 끝나고 죄인들한테 '여러분의 고도는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술, 빵, 고기, 여행 등 각기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고 해요. 고도가 무엇인지는 딱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것 같아요."
2005년부터 작품에 합류한 에스트라공 역의 박상종 배우는 코로 웃는 연기 등으로 관객의 웃음을 유발했다. 그는 고도의 의미에 대해 "베케트는 신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절대자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며 "어떨 때는 억울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일을 위해 기다려야 하는 절대자로 해석했다"고 말했다.
이외 지주 '포조' 역에는 정나진, 포조의 짐꾼 '럭키' 역은 문성복 배우가 맡았다. '소년' 역은 문성복 배우의 아들 문다원이 연기한다. 공연은 다음달 4일까지.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