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출신으로 뒤늦게 건설업
쉰살 무렵 기초부터 익혀가며
외환위기 시절에 완판 신화도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로 키워
협력사 상생에 사회 나눔까지
늘 원칙 강조해온 정도 경영인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외로운 길이었지만 그게 올곧다고 여겼다. 나이 쉰, 남들은 은퇴를 준비할 나이에 건설업에 뛰어들어 40년 넘게 한 우물만 팠다. ‘맨주먹 건설신화’를 써 내려간 이광래 우미건설 창업주 겸 회장이다. 그가 지난 9일 영면했다. 향년 92세.
1933년 전남 강진군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 회장은 원래 군인이었다. 1955년 사병으로 입대해 1957년 광주 상무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 1973년 8월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18년간 경리장교로 복무했다.
이후 연금을 받으며 안정적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연금 대신 퇴직금 180만원을 챙겼다. 이 가운데 150만원의 자본금을 들여 고향 친구와 동광써키트라는 전자부품 회사를 차린다. 하지만 동업자가 숨지면서 사업도 망했다. 다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양돈 사업을 벌였지만 당시 유행한 돼지콜레라로 또 한 번 실패했다.
나이 쉰을 목전에 둔 1982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건설업에 눈을 돌렸다. 주택을 제대로 지어 팔고 싶었다. 이때 사람들을 사귀려고 예비군 중대장에도 자원했다. 낮에는 예비군 중대장으로 일하고 밤에는 주택 건설업을 공부해 그해 삼진개발(우미건설의 전신)을 세웠다. 그가 처음 지은 아파트 이름도 삼진맨션이다. 18가구 3층짜리 연립주택이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당시 이 회장은 아파트 사업을 하는 건설사 사장 중 나이가 제일 많았지만 설계에서 착공, 준공, 분양까지 다 직접 챙겼다”며 “그 결과 평면 구성부터 단지 설계, 조경까지 주택에 관한 모든 걸 아는 경영자가 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사업 초기 설계를 배우고자 전국의 견본주택을 죄다 돌아다녔다. 현장에서 그를 수상히 여긴 견본주택 직원과는 실랑이도 벌였다. 그는 아파트를 지을 때마다 ‘3개년 자금 수급 계획서’를 직접 작성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 계획 안에는 모든 일정과 자금 전략, 완공 후 입주 전망, 다른 아파트와의 비교 분석 등이 빼곡히 정리돼 있었다.
1986년 사명을 우미건설로 바꾸고 대규모 건설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광주 남구 주월동에 800가구 규모의 라인광장 아파트를 분양했다. 1990년대에는 순천 연향지구 공동주택사업에도 진출했다. 1992년 3월 우미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후 2000년대부터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 각지 대도시에서 사업을 전개하며 우미그룹을 국내 대표 건설회사로 성장시켰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삼은 경영인이었다. 광주 서구 풍암지구에 1200가구의 공공임대 아파트 공사를 막 시작했을 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주변 주택업체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갔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고 당시 목포에 3필지를 추가로 받아 1500가구 완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회장은 언제나 원칙을 강조하는 정도 경영에 몰입했다. 협력사에 자금 결제는 한 번도 미룬 적이 없고, 납세도 깨끗했다. 성실납세 표창만 다섯 번을 받았다. 2006년에는 사회공헌을 위해 금파재단(현 우미희망재단)을 만들어 국가유공자 주거 개선 사업 등을 펼쳤다.
그는 2019년 건설의 날 기념식 때 건설업에 뛰어든 지 37년 만에 업계 최고 상인 ‘금탑산업훈장’을 목에 걸었다. 우미건설 관계자는 “이 회장은 늘 내 집을 직접 짓는 가장의 마음으로 주택 사업을 영위했다”고 말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장남 이석준 씨(우미글로벌 부회장)와 차남 석일 씨, 장녀 혜영 씨(우미건설 건축디자인실장)가 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발인은 12일 오전 5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