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이 익는다
9일 니가타현 니가타시 도키(朱鷺)멧세 컨벤션센터에 들어서자 술내가 콧속을 채운다. 니가타 사케(청주·니혼슈·日本酒) 양조장들의 술 박람회 ‘니가타 사케노진(酒の陣) 2025’ 현장이다.
혼슈 서부 해안선 330km를 끼고 있는 니가타현에는 89개 양조장이 있다. 일본 전역에 1500곳 넘게 있는데, 니가타에 가장 많다. 쌀을 발효시켜 빚는 술인 만큼 쌀도 제일 많이 난다. 니가타를 관통하는 일본 최장 시나노(信農)강 하류가 평야 지대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품종 고시히카리가 여기서 난다. 눈도 연간 가장 많이 내리는 터라 폭설에 발이 묶이는 시간이 많아서일까, 연간 어른 한 명이 사케를 8.6L 사 마신다. 일본 성인 평균은 4L다.현장에서 주는 시음용 자기(磁器) 잔을 들고 서너 시간 돌아본다. 술을 끊었기에 향만 맡았는데도 머리가 살짝 띵하다. 불콰해진 얼굴들, 비틀대는 사람들, 부축하는 친구들. 곳곳에서 들리는 잔 깨지는 소리. 인간미가 넘실댄다. 컨벤션센터를 끼고 시나노강이 흐른다. 사도(佐渡)섬 가는 여객선 터미널이 지척이다. 취한 듯 20대 남녀 예닐곱 명이 강가에서 깔깔대다 목청껏 노래한다. 친근감이 더해진다.
사케는 씻고 불리고 찐 쌀로 쌀누룩과 모로미(술밑)를 만들고 여기에 물과 지에밥을 넣어 발효시킨 다음 짜고 걸러 만든다. 누룩균과 효모균 이외 잡균이 살기 어려운 겨울에 제조한다. 12월~2월에 바짝 술을 내린다. 3월이면 새 술을 들고 사케노진에 나온다.많은 양조장에 일반인 견학 프로그램이 있지만 쌀누룩 제조실과 발효실은 공개하길 꺼린다. 잡균이 들어와 전분을 당(糖)으로 바꾸는 누룩균과 당을 알코올로 발효시키는 효모균에 악영향을 끼칠까 봐서다. 니가타시의 126년 된 다카노(高野)주조가 특별히 발효 탱크 속 모로미를 장대(카이보)로 젓는 ‘카이이레’를 허락했다. 단, 체험 직전 식사에는 낫토, 요구르트, 김치 같은 발효음식은 먹지 못한다. 유산균 등이 술맛을 망칠 수 있다. 하루 세 번, 15분씩 저어 발효될 때 생기는 거품을 없앤다. 전국에서 몇 년에 한 명, 카이이레를 하다 탱크에 빠진다.
시바타(新発田)시 고몬(王紋)주조는 쌀누룩 제조실을 살짝 보여 줬다. 술맛과 제조법을 정하고 공정을 총괄하는 주조책임자 토우지(杜氏)가 안내한다. 여성이 양조장 문턱을 넘은 지는 몇십 년밖에 안 된다. 235년째 한자리에 있는 이곳에서 일본 최초 여성 토우지가 나왔다. 쌀누룩 제조실은 누룩균 배양에 적당하도록 섭씨 35도 정도로 맞춰 사우나 같다. 무더위와 쌀누룩이 만들어질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에 쓰러지는 작업자도 있다.
약 3주간 발효 후 그해 첫술을 내릴 무렵 양조장 현관 처마 끝에 스기다마(杉玉)를 매단다. 푸른 삼나무 잎들을 공처럼 모은 것이다. “새 술이 곧 나온다”는 뜻이다. 나가오카(長岡)시 세타야(攝田屋)의, 1548년 개업한 요시노가와(吉乃川)주조에도 달려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이다. 병에 술 넣는 작업을 하던 공간을 사케 뮤지엄으로 만들었는데 그곳 스기다마는 황갈색으로 변했다. 사케가 다 익었다.
● 봄, 눈(雪)
평야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인 주택은 거의 다 이층집이다. 눈이 현관보다 높이 쌓이는 일이 잦기에 2층은 임시 출입구다. 니가타가 배경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설국’에서는 아이들이 2층 창밖으로 나가 눈 속에서 헤엄치듯 길을 낸다. 큰길가나 들판에 하양, 빨강 아니면 노랑, 검정을 번갈아 칠한 높이 2~3m 막대가 꽂혀 있다. 눈이 얼마나 내렸나 눈대중할 수 있다.
핫카이산주조 양조장 겸 전시장인 우오누마노사토(魚沼の里)에는 사케 숙성용 탱크가 들어선 유키무로(雪室)가 있다. 건물 내부 한쪽은 1만8000L들이 탱크 20개, 다른 한쪽은 대략 가로세로와 높이 각 10m 이상 눈이 쌓여 있다. 눈은 1000t까지 쌓을 수 있다. 눈이 녹으며 나는 냉기로 섭씨 4도 안팎을 유지해 부드럽게 술을 익힌다. 옛날엔 눈이 녹지 않게 온통 볏단으로 덮고 그 안에서 술을 숙성시켰다.
니가타는 ‘눈이 많이 내려서 산의 눈석임물(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서 흐르는 물)이 풍부해 논농사에 적합한 조건’을 갖췄다고 한다(‘사케 소믈리에가 들려주는 일본 술 이야기’, 추조 카즈오 지음, 시사일본어사, 2023). 물이 좋으니 쌀도 좋다. 그럼에도 술에 더 적당하도록 잡맛을 내는 단백질 함량을 낮춰 품종 개량한 주조호적미(酒造好適米)를 만들었다. 니가타산 고하쿠만고쿠(五百萬石)가 유명하다.
폭설에 갇힌 스위스인들이 집에서 놀라운 시계 제조 기술을 익혔듯, 니가타인들은 금속가공에 매진하기도 했다. 츠바메(燕)-산조(三條)시가 그렇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캠핑 브랜드 ‘스노우피크’ 본사가 산조에 있다. 츠바메산업사료관에서는 빼어난 솜씨의 금동그릇(銅器), 줄, 담뱃대, 야타테(矢立·휴대용 붓통), 양식기(洋食器) 등을 만날 수 있다. 사업사료관 체험 공방에서는 주석판으로 직접 사케 잔을 만들어 볼 수 있다. 현역을 떠난 60대 중후반 남성 기술자들이 도와 주는데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의 열정을 보인다.
● 신록이 온다
눈 많고 물 맑고 쌀 좋고 술 좋으니 부(富)가 뒤따른다. 니가타시 아가노(阿賀野)강 서쪽 평야 대지주 이토(伊藤) 가문, 약용주(藥用酒) ‘사프란슈(酒)’로 떼돈을 번 요시자와 닌타로(古澤仁太郞), 도쿄 제국호텔을 지은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같은 부호가 나왔다.
150년 전 지은 요시자와 옛 저택과 사프란슈 본점 건물 앞에서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 공습이 멈췄다. 메이지 시대 요메이슈(養名酒)와 함께 약용주 시장을 양분하며 만병통치약으로까지 불린 사프란슈는 지금도 이곳에서 팔고 있다. 전시장 한쪽에 70년 된 일본 수제 피아노 슈베스터(Schwester)가 놓여 있다. 댄디하게 차려입은 가이드가 쇼팽 ‘에튀드’ 한 대목을 치자 여전히 맑은 소리를 낸다.
니가타 50개 스키장에서는 5월 초까지 슬로프를 개방하지만 4월이면 다른 곳 눈은 거의 녹는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외지인은 봄 설경에 넋을 잃지만, 현지인에게 눈은 골칫거리다. 우오누마노사토에서 니가타 사람이 말했다. “눈이 정원 풍경을 망쳤네.” 눈부시게 푸르른 날엔 시바타성(城) 벚꽃을, 야히코(弥彦) 신사의 곧게 뻗은 삼나무 숲을, 그래서 니가타를 더 그리워할 터다.
츠키오카(越岡) 온천마을 시라타마노유(白玉の湯) 가호(華鳳)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묵는다.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됐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설국’,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21)
글·사진 니가타(일본)=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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