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가장 사랑한 일본인, 다카하기의 회상 “최용수 감독이 일본어로 ‘계약 언제 끝나냐’고 물었던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7 hours ago 3

다카하기 요지로(38·은퇴). FC 서울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일본인 선수다.

다카하기는 2003년 산프레체 히로시마(일본)에서 16살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한 ‘천재’였다. 다카하기는 이후 웨스턴 시드니(호주), 서울, FC 도쿄, 도치기 SC(이상 일본), 알비렉스 니가타 싱가포르(싱가포르) 등을 거쳤다.

다카하기는 올해 1월 선수 생활을 마쳤다. 7월 16일 일본 매체 ‘풋볼 존(FOOTBALL ZONE)’은 다카하기와의 인터뷰를 전했다.

FC 서울에서 2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FC 서울에서 2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FC 서울 시절 다카하기 요지로(사진 왼쪽). 사진=AFPBBNews=News1

FC 서울 시절 다카하기 요지로(사진 왼쪽). 사진=AFPBBNews=News1

다카하기 요지로는 2015시즌 FA컵(코리아컵의 전신)에서 FC 서울의 우승을 이끌었다. 다카하기는 2015시즌 FA컵 MVP(최우수선수)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다카하기 요지로는 2015시즌 FA컵(코리아컵의 전신)에서 FC 서울의 우승을 이끌었다. 다카하기는 2015시즌 FA컵 MVP(최우수선수)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다카하기는 한국에 오기 전 호주 A-리그에서 큰 충격을 받았음을 고백했다. 다카하기는 ‘풋볼 존’을 통해 이렇게 회상했다.

“호주에서 첫 경기를 마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축구가 아닌 럭비 같았다. 몸싸움이 너무 많았다. 90분 내내 쉼 없이 부딪혔다. 일본에선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축구였다.”

다카하기는 호주에서 처음 수비형 미드필더로 경기를 풀어가는 법을 익혔다. 이는 서울에서 큰 성공울 거두는 데 자양분이 됐다.

다카하기는 “웨스턴 시드니는 당시 4-4-2 포메이션을 사용했다”며 “나는 웨스턴 시드니로 향하기 전까지 처진 스트라이커나 플레이메이커로 뛰었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호주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백패스나 측면으로 내주는 패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전진 패스를 선호했다. 웨스턴 시드니엔 경기를 만들어갈 선수가 필요했다. 내가 그 역할을 맡았다. 플레이 스타일에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라고 했다.

웨스턴 시드니 시절 다카하기 요지로(사진 오른쪽). 사진=AFPBBNews=News1

웨스턴 시드니 시절 다카하기 요지로(사진 오른쪽). 사진=AFPBBNews=News1

다카하기는 이후 서울 유니폼을 입는다.

다카하기는 서울의 첫인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시드니 풋볼 스타디움에서 서울과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경기를 마친 뒤였다. 당시 서울을 이끌었던 최용수 감독이 내게 다가왔다. 최용수 감독이 내게 일본어로 ‘계약 언제 끝나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1월부터 5월까지 계약을 맺었다. 올여름이면 끝난다’고 답했다. 최용수 감독이 ‘연락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해 여름 서울 유니폼을 입었다.”

서울이 다카하기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건 다카하기의 시드니 시절이 아니었다.

다카하기가 히로시마 플레이메이커로 뛰었던 2014시즌이었다. 서울은 당시 히로시마와 ACL 조별리그에서 맞붙었다.

히로시마가 2014년 3월 19일 일본 히로시마 애슬레틱 스타디움에서 치른 서울전이었다. 다카하기는 이날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히로시마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다카하기란 이름은 이날 최용수 감독의 뇌리에 각인됐다.

다카하기는 2015시즌 후반기부터 서울 중원 핵심으로 맹활약했다.

다카하기는 서울의 2015시즌 FA컵(코리아컵의 전신) 우승에 앞장섰다. 다카하기는 2015시즌 FA컵 최우수선수상(MVP)도 받았다. 2016시즌엔 서울의 K리그1 역전 우승에 힘을 보탰다.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대한축구협회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대한축구협회

다카하기는 호주에서의 경험이 서울 적응에 큰 도움이 됐음을 밝혔다.

다카하기는 “호주에서 6개월을 보낸 게 아주 큰 도움이 됐다”며 “한국은 몸싸움이 대단히 치열했지만, 호주를 경험했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돌아봤다.

다카하기는 이어 “한국의 몸싸움 강도는 일본과 호주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당시 서울엔 한국 대표팀 출신 선수가 꽤 많았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던 차두리, AS 모나코와 아스널에서 뛰었던 박주영도 있었다. 주빌로 이와타에서 뛰었던 김진규도 기억난다. 데얀, 아드리아노란 최고의 외국인 선수와 함께하는 것도 재밌었다”고 했다.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대한축구협회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대한축구협회

다카하기가 말을 이었다.

“우린 3-5-2 포메이션을 썼었다. 나는 서울에서 공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스마르란 스페인 선수가 내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 덕분이었다. 나는 수비 라인 오른쪽에 있었는데 미친 듯이 공·수를 오가는 차두리가 윙백으로 있어서 아주 든든했다. 나와 오스마르, 차두리가 공간을 메워가는 등 좋은 호흡을 보였던 게 생각난다. 진짜 잘 맞았다. 그러다 보니 축구가 참 재밌었다. 나는 서울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플레이할 수 있었다.”

다카하기는 서울 2년 차 시즌 ACL에서 친정 팀 히로시마, J1리그 강호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를 상대하기도 했다. 특히나 다카하기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히로시마전에서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4-1 대승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16강전에선 서울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우라와 선수들과 쉼 없이 부딪혔다.

‘풋볼 존’에 따르면 다카하기의 헌신과 투지는 당시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됐다.

“히로시마에선 공격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서 일본 언론이 나의 바뀐 플레이 스타일에 집중했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서 좋은 선수들과 뛰었다. 주변을 잘 보고 패스를 찔러 넣으면 해결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었다.”

FC 서울에서 2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FC 서울에서 2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다카하기는 서울에서 생활하며 좋은 추억을 남겼음을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서울이란 도시와 사람들도 아주 좋았다. 생활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솔직히 한국에 더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최용수 감독이 중국 장쑤 쑤닝(해체)으로 향하면서 많은 게 달라졌다. 황선홍 감독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나의 출전 시간이 점점 줄었다. 제일 아쉬웠던 건 2016 ACL 준결승전이었다. 나는 당시 전북 현대와의 ACL 준결승 1, 2차전 모두 벤치에 머물렀다. 그게 너무 아쉽다.”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다카하기 요지로.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다카하기는 2017년 1월 서울과 작별했다.

다카하기는 당시 서울에서 치열한 주전 경쟁을 다짐하고 괌 동계 훈련에 참가했지만, 도쿄의 적극적인 구애에 마음을 바꿨다.

“처음엔 서울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서울과의 계약도 1년 더 남은 상태였다. 나는 서울에서 내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다. 내가 괌에서 진행된 전지훈련에 참가했던 이유다. 그런데 동계 훈련 중 도쿄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았다. ‘주전 보장과 ACL 우승 도전’이란 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렇게 서울을 떠나게 됐다.”

[이근승 MK스포츠 기자]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