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신하연 기자] 주주권 강화를 강조하는 이재명 정부 출범 전후로 자진 상장폐지(상폐)를 추진하는 기업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이달 10일까지 자진 상폐를 목적으로 공개매수를 진행 중인 텔코웨어(078000)에 이어 의류 브랜드 ‘탑텐’ 등을 운영하는 신성통상(005390)이 공개매수에 나섰다. 여당이 상법 개정 등 관련 움직임에 속도를 내면서 기업 경영 환경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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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점검 2차 태스크포스(TF)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소액주주와 마찰’ 신성통상, 지분 11% 공개매수 돌입…자진상폐 목적
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신성통상(005390)은 이날부터 내달 9일까지 한 달간 자진 상폐를 위한 공개매수를 추진한다. 지난해 6월 소액주주 반발에 공개매수가 무산된 지 1년여 만이다. 이번에 제시한 매수가액 4100원으로 지난 공개매수 당시의 2300원 대비 약 78% 높아졌다. 지난 5일 종가 기준 3020원보다는 약 35.8% 높은 수준이다.
신성통상 주식 2317만 8102주(발행 주식의 16.13%)를 매입하는 공개매수 주체인 가나안과 에이션패션은 모두 최대주주인 염태순 회장 일가가 100% 지분을 보유한 비상장사다. 가나안(45.63%)과 에이션패션(20.02%), 오너 일가(18.22%) 등이 들고 있는 신성통상 지분은 올 1분기 말 기준 83.87%다. 공개매수를 통해 약 11%의 지분만 확보해도 염 회장 측 지분은 상장폐지 요건인 지분율 95%를 넘게 된다.
시장에선 이번 결정을 두고 염 회장이 2세인 염상원 가나안 사내이사로의 경영 승계를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공개매수 후 상폐를 결정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특히 그간 배당 등 주주환원 문제를 두고 소액주주들과 마찰을 빚어온 만큼, 주주 권한을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기 전 경영 개입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선제적 상폐’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신성통상은 올 1분기 말 기준 3700억원이 넘는 이익잉여금을 보유하고 있지만 지난 10년간 주주배당은 2023년 1건(총 71억원)에 그쳤다. 반면 오너 일가 회사인 가나안의 경우 2021년부터 3년간 배당한 금액이 410억원에 달한다. 염상원 씨는 가나안 지분 82.43%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염 회장(53.3%)과 가나안(46.5%)이 지분을 대부분 보유하고 있는 에이션패션도 2022~2023년에만 약 300억원을 배당했다.
◇李정부 출범에 선제 대응…“매수가액 산정 방식 재검토해야” 목소리도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소액주주의 권리 강화를 강조해왔다. 그 일환으로 지난 5일 민주당이 재발의한 상법 개정안에는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 ‘집중투표제 강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3%룰’ 등 주주 권익 강화를 핵심으로 하는 내용이 담겼다. 상법 개정안은 이르면 오는 12일 본회의에서 처리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부 기업이 선제적 조치에 나서는 분위기다. 대표적으로 통신 소프트웨어(SW) 업체 텔코웨어의 최대주주 금한태 대표는 이달 10일까지 전체 발행 주식의 25.24%를 공개매수 중이다. 텔코웨어는 자사주 407만6074주(전체 주식의 44.11%)를 보유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공약 중 하나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시행될 경우 공개매수 공시 전인 지난달 16일 종가 9810원을 기준으로 약 400억원어치의 주식을 소각해야 하는 만큼 자진 상폐에 나서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 상장사 관계자는 “이재명 정부가 주주환원 확대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기업 입장에선 경영 간섭이 확대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며 “자사주 보유 비중이 높은 기업의 경우 소각 시 대주주 지분율이 희석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선 상장사들의 이같은 움직임이 국내증시 밸류업(가치 제고) 측면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새정부 출범 후 상법 개정 등 정책이 본격 추진되는 가운데 자진 상폐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우리나라 상장기업 수가 과도하게 많은 상황에서 구조적인 정리가 이뤄지는 것 자체는 밸류업 방향과도 부합한다”고 진단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기존 소액주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공개매수 가격 산정 방식에 대한 재검토를 서둘러야 한다”며 “통상 일정 기간 거래량 가중 평균 주가에 프리미엄을 붙이는 현행 공개매수가 산정 방식은 (주가 방향의) 조작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합리적인 산실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소액주주가 결집할 경우 공개매수에 실패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앞서 가나안과 에이션패션은 지난해 지분 5.89%만을 확보하며 공개매수에 실패한 바 있다. 당시 주주들은 공개매수 가격이 오너 일가 간 지분 거래가인 주당 4920원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가격이라며 반발했다. 이번 제안가 4100원 역시 이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이달 2일까지 자진 상폐를 위한 공개매수를 진행한 한솔PNS(010420)의 경우에도 공개매수에 응한 주식이 공개매수 예정수량(325만290주)의 26.6%에 그친 86만4851주에 불과했다. 공개매수 후 한솔홀딩스의 한솔PNS 지분율은 88.36%으로 자진 상폐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