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굴곡을 지나온 자만이 내는 소리, 백건우가 들려준 생의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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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연주자의 나이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젊은 연주자에 비해 속도나 에너지가 뒤처지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닫는다. 되레 삶의 모든 굴곡을 지나온 자만이 비로소 전할 수 있는 담백하면서도 깊은 울림에 전율하게 된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1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백건우와 슈베르트' 리사이틀에서 연주에 몰입하고 있다./사진=경기아트센터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1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백건우와 슈베르트' 리사이틀에서 연주에 몰입하고 있다./사진=경기아트센터

지난 18일 경기도 수원시 경기아트센터에서 열린 ‘백건우와 슈베르트’ 리사이틀이 그랬다. 70년 세월 건반을 매만져온 팔순의 거장 백건우는 이날 그의 투박한 손끝으로 서른 한살에 요절한 천재 작곡가 슈베르트(1797~1828)의 세계를 섬세하게 펼쳐 보였다. 슈베르트와 함께 낭만주의 대표 작곡가로 꼽히는 브람스(1833~1897)의 작품도 선보였다. 이번 무대는 그의 새 앨범 ‘슈베르트’ 발매를 기념한 전국 투어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1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백건우와 슈베르트' 리사이틀에서 연주에 몰입하고 있다./사진=경기아트센터.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18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백건우와 슈베르트' 리사이틀에서 연주에 몰입하고 있다./사진=경기아트센터.

첫 곡은 ‘가곡의 왕’ 슈베르트다운 감미로운 선율이 돋보이는 ‘피아노 소나타 13번’이었다. 슈베르트가 스물두살 당시 오스트리아의 한적한 시골 마을을 여행하며 쓴 이 곡은 백건우가 자신의 음악 인생 초기에 익혔던 각별한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초봄의 싱그러운 연둣빛을 머금은 1악장을 지나 잔잔한 고요가 일렁이는 2악장, 경쾌한 멜로디의 3악장까지 한 곡 안에 청춘의 드라마가 녹아 있었다.

1부의 마지막은 브람스의 ‘네 개의 발라드’가 장식했다. 브람스의 스승인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시기에 작곡해 암울한 색채가 두드러지는 곡. 먹구름이 몰려오듯 긴장감이 서린 제3곡에서 백건우는 상체를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면서도 강력하고 묵직한 음들을 쏟아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사진=경기아트센터

피아니스트 백건우./사진=경기아트센터

2부는 슈베르트가 생애 마지막 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20번’으로 채워졌다. 앞선 피아노 소나타 13번의 1악장보다 한층 단단해진 기운으로 문을 연 이 곡은 청춘마저 피할 수 없는 고독과 번뇌를 그리는 2악장을 지나 인생의 황금기를 담은 왈츠풍의 3악장, 마침내 고통까지 넉넉하게 끌어안는 평온한 분위기의 4악장으로 끝난다.

사제복을 연상시키는 정갈한 연주복 차림의 백건우는 끝내 작은 희망으로 마무리되는 이 곡으로 삶을 향한 찬미의 메시지를 조용히 건넸다.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별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곡에선 일부 음정 실수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삶의 희로애락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여전히 탄탄한 손가락 근력, 절제된 야성미, 다음 악장으로 넘어갈 때 찰나의 여백까지 리듬으로 소화하는 백건우만의 연륜이 긴 여운을 남겼다. 백건우는 그의 생일인 5월 1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같은 레퍼토리로 무대에 선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18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리사이틀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사진=경기아트센터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18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리사이틀을 마치고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사진=경기아트센터

수원=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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