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이 국내 고정밀 지도 반출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린 한미 각료급 협의와 3차 실무 기술협의에서 미국 측이 고정밀 지도 반출을 무역협상 카드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캐나다 등에선 구글이 우리 정부에 요구하는 수준의 고정밀 지도 없이도 '길찾기'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내달 '지도 반출' 여부 통보…구글, 여론전 강화
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다음 달 11일 안으로 구글이 요구한 1대 5000 축적의 고정밀 지도 반출 요청과 관련해 허가 여부를 통보해야 한다. 구글과 마찬가지로 고정밀 지도를 요청한 애플엔 오는 9월8일 내로 반출 허가 여부를 알려야 하는 일정이다.
구글은 자사 지도 서비스 중 길찾기 기능을 국내에서만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1대 5000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국내에서 구글 지도를 이용하지 못해 불편을 겪고 있다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해 왔다.
국내 고정밀 지도 반출을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상현 구글 플랫폼·디바이스 정책 부문 글로벌 디렉터는 지난달 비즈니스 네트워크 서비스 '리멤버'를 통해 "구글 지도 길찾기 기능, 이걸 한국에선 아직도 쓸 수 없다. 전 세계 수십억명이 20년 넘게 매일 쓰는 기능인데 국내는 규제로 사용이 제한돼 있다"고 주장했다.
길찾기 기능은 구글 지도 사용자가 목적지를 설정하면 최적의 경로를 안내하는 길안내 서비스다. 이 기능을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는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구글 측 주장이다.
구글은 국내 여행 유튜버 중 가장 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빠니보틀'을 앞세워 지도 반출에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다. 빠니보틀이 공개한 영상을 보면 구글은 그를 아시아태평야 지역 본사로 초대해 "국내 사업 보호 때문에 그랬다고 해도 인정할 수 있는데 이제는 풀어줘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발언을 끌어냈다.
미국도 없는 '1대 5000 지도'…길찾기는 정상 지원
국토지리정보원은 과거 두 차례에 걸쳐 국내 고정밀 지도 반출을 요구한 구글 요청을 모두 불허했다. 안보 우려를 이유로 들었다. 애플 역시 최근 고정밀 지도를 요구했는데 구글과 달리 국내에 서버를 두고 가림(블러)·위장·저해상도 처리를 통해 우려를 해소하겠단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구글은 고정밀 지도를 요구하는 핵심 사유로 길찾기 서비스를 꼽고 있지만, 정작 1대 5000 축적 지도가 없는 다른 국가에선 길찾기 서비스를 정상적으로 제공하고 있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1대 5000 축적의 고정밀 지도를 구축한 국가는 많지 않다. 미국조차 가장 상세한 지도가 1대 2만4000 수준에 불과하다. 캐나다는 국토가 넓어 이보다도 낮은 1대 5만 축적의 지도만 제공하고 있다. 호주와 인도는 각각 1대 2만5000, 러시아는 1대 1만 축적의 지도만 구축한 상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대 5만 수준이다.
하지만 구글은 이들 국가에서 길찾기나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별다른 문제없이 제공 중이다. 1대 5000 축적 지도를 구축조차 못한 국가에서 길찾기·내비게이션 서비스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만큼 구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박도 흘러나온다.
반면 구글 측은 다른 국가에서도 1대 5000 축적 지도를 기반으로 길찾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입장. 이와 관련해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자체 위성을 보유한 구글이 1대 5000 지도가 구축되지 않은 곳에서 길찾기 서비스를 지원하는 건 위성 기술로 버금가는 수준의 지도를 딸 수 있다는 얘기인데, 굳이 한국에 지도 반출을 요청할 이유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한국은 지난 25년간 1조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해 1대 5000 축적의 고정밀 지도를 구축했다. 자율주행용으로는 1대 1000 수준 정밀도로지도를 제작할 정도로 고도화된 기술을 갖췄다. 영국·프랑스·일본 등 선진국들도 1대 1250~1대 2500 축적 지도만을 구축했을 뿐, 고정밀 지도를 구축한 국가 자체가 드물다.
1대 5000 축적 지도는 주로 도시 계획이나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기업간거래(B2B) 거래 용도로 활용된다. 해외 관광객을 위한 지도 서비스를 제공할 땐 1대 2만5000 축적 지도만으로 충분하다는 반론이 나오는 이유다. 애플은 1대 2만5000 지도로 국내에서 길 안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구글 측 주장과 달리 지도 반출을 제한하는 국가도 적지 않다. UN세계지형공간정보운영위원회(UN-GGIM)·국제사진측량 및 원격탐사학회(ISPRS)에 따르면 싱가포르·러시아·덴마크·몽골·사우디아라비아·중국 등 16개국이 지도 데이터 해외 반출을 제한하고 있다.
'지도 반출' 불허, 비관세 장벽?…EU는 "협상 대상 아냐"
국내 고정밀 지도 반출 압박은 한층 더 거세졌다. 미국이 고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양국간 무역 불균형 요인이 되는 '비관세 장벽'의 하나로 지목해서다. 이에 고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한미 무역협상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반면 유럽연합(EU)은 구글 등 플랫폼 기업들을 규제하는 디지털시장법(DMA)·디지털서비스법(DSA)을 무역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DMA·DSA를 과도한 규제로 지목했는데도 무역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국회에선 최근 보안 조치 등의 의무를 이행할 경우 지도 데이터를 반출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안이 발의됐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방부 장관 후보자 지명 전인 지난달 16일 공간정보관리법 일부개정안을 대표발의하면서 "구글 등 국외 기업이 지속적으로 국내 지도 데이터 등 공간정보의 국외 반출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미국 정부가 지도 반출 제한을 비관세 장벽으로 지목하면서 향후 관세 협상 등의 이유로 지도 국외 반출을 결정할 경우에 대비해 필요한 조건들을 법률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 법안은 기본측량성과를 국외 반출할 경우 1대 2만5000 축적 이하 지도까지만 가능하도록 하고 이를 반출받으려는 사업자가 국내에 데이터센터를 설치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 골자다.
"지도 반출 허용 땐 국내 기업 경쟁력 급속히 약화"
업계에선 구글이 국내 자율주행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요구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소상공인들 우려도 크다. 소상공인연합회도 지난 4월 성명을 내고 "지도 반출을 허용한다면 택시업과 대리운전업 등의 소상공인은 물론 관련한 수십만명의 일자리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글 측은 자율주행 사업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구글은 길찾기 서비스를 '주된 목표'로 역설하고 있다. 이 디렉터는 "이 기능(길찾기)을 활성화시키는 게 주된 목표 중 하나"라며 "외국인 관광도 지방 곳곳까지 더 활성화할 수 있고 소상공인들과의 접근성도 높아질 수 있으니 지역경제 전반에 긍정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정밀지도를 제작하고 있는 국가도 많이 없을 뿐더러 한국 외에도 지도 반출을 제한하는 국가도 상당수"라며 "동일한 조건 하에 애플이 제공하는 기능을 구글은 한국에서만 제공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와 닿지 않는다"고 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