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담동 갤러리서림
'시가 있는 그림' 展 개최
한 여름 태양 아래 흐드러지게 핀 빨간 꽃이 정열적이다. 마치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같다. 원로 구상화가 김일해는 지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나태주 시인의 '두고 온 사랑'에서 이 장면을 떠올렸다. '두고 가세요/ 좋아했던 마음/ 그리워했던 마음/ 서러웠던 마음도 놓고 가세요// 찾아가려 하지 마세요/ 꽃이 될 거예요/ 분꽃도 되고 봉숭아도 되고/ 수탉 벼슬로 붉은 맨드라미도 될 거예요// 새벽잠 깨어 혼자 하늘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별빛도 되겠지요/ 사랑하는 마음 찾아가려 하지 마세요.'
따뜻하고 소박한 언어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아온 나태주 시인의 시를 형상화한 그림들을 펼치는 '제38회 시(詩)가 있는 그림전'이 서울 청담동 갤러리서림에서 오는 18일 개막한다. 강종렬·김일해·김재성·권다님·안윤모·윤형재·이명숙·정일·최종용·황은화·황주리 등 다양한 세대 작가 11명이 참여한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시가 있는 그림 달력'(2025년도)으로도 만들어진다.
김성옥 갤러리서림 대표는 "화가들이 자신의 마음에 든 시를 그림으로 재구성한 시화(詩畵)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라며 "이번 전시는 올해 팔순을 맞은 나태주 선생님께 올리는 축하와 축원의 뜻으로 준비했다"고 밝혔다.
서양화를 통해 한국적인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 윤형재 작가는 나태주 시인의 대표작 '풀꽃'에서 느껴지는 소박한 감성을 점·선·면 등 기하학적 요소로 간결하게 그린 콜라주 형태의 풀꽃 이미지로 풀어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동백꽃 화가' 강종렬 작가는 짧은 사랑의 아련함을 은유한 나 시인의 시 '동백'에서 겨울 눈보라를 이겨내고 붉게 피어난 설동백을 봤다. '짧게 피었다 지기에/ 꽃이다// 잠시 머물다 가기에/ 사랑이다// 눈보라 먼지바람 속/ 피를 삼킨 통곡이여.' 다만 시는 '피를 삼킨 통곡'이라고 했지만, 강 작가의 동백꽃에서는 갖은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이 돋보인다.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등 저서를 출간하기도 한 황주리 작가는 나 시인의 '꽃들아 안녕!'을 즐겁고 경쾌한 파티 분위기로 화폭에 옮겼다.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부터 눈을 감고 그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 초를 가득 꽂은 케이크, 마주 잡은 손까지 활짝 핀 꽃송이를 가득 채우고 있다.
동화적인 화풍을 가진 정일 작가는 나 시인의 '꽃이 되어 새가 되어'를 잔잔하고 부드러운 색감으로 표현해냈다. 그 밖에 안윤모 작가의 '겨울행', 이명숙 작가의 '아침', 황은화 작가의 '옛날찻집', 김재성 작가의 '꽃', 최종용 작가의 '바다', 권다님 작가의 '행복'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갤러리서림이 1987년부터 매년 개최해온 '시가 있는 그림전'은 지난 38년 동안 김소월·정지용·이육사·이상·박목월·박두진·김남조 등 한국 문단 거장들의 시 588편을 작가 123명의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번 전시는 내년 1월 10일까지 열린다.
[송경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