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서울지리지]
내시·궁녀의 은밀한 삶과 죽음
내시, 신분상승 위해 고자수술후 자원
사내구실 못했지만 부인에 첩까지 둬
궁궐 주변 생활, 퇴직후 은평에 집단 거주
궁녀, 궐내 살림 총괄해 숫자 내시 두배
병 걸려야 출궁, 사후 친정 선산에 매장
“이말산에 방치된 영혼들의 넋을 위로하며 도성을 바라보게 세우다.”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 중앙에 위치한 이말산 정상의 비목(碑木)에 쓰인 문구다. 이말(莉茉·자스민)이 많이 서식해 생긴 명칭이다. 영혼들은 어쩌다 방치됐고 또한 무슨 연유로 비목이 국왕이 사는 도성을 향하게 했다는 말인가.
진관동은 한양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금장(禁葬·매장 금지) 구역의 바로 바깥에 위치하고 무악재와 박석고개(礡石峴·연신내역과 구파발역 사이 고개)에 의해 격리돼 조선 초부터 집단 매장지로 애용됐다. 이말산에는 실제 다양한 성씨의 묘역이 산재한다. 2009년 조사에서 유연고 묘지 313기, 무연고 묘지 1433기 등 총 1746기의 분묘가 확인됐다. 그중 내시와 궁녀의 묘가 다수 발견됐다. 내시는 중종·명종대 내시부를 이끌었던 상선(尙膳·종2품) 노윤천, 1501년(연산군 7)에 사망한 상다(尙茶·정3품) 김경량, 1617년(광해군 9)에 사망한 상세(尙洗·정6품) 정여손 등이 묻혀 있다. 노윤천은 1546년(명종 1) 을사사화(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윤임 일파의 대윤을 숙청한 사건) 때 왕명을 전달한 공로로 위사원종공신에 녹선된 인물이다.
내시는 환관(宦官), 내관(內官), 중관(中官), 중사(中使), 사인(使人), 환자(宦者)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내시 제도는 중국 은(殷)나라 갑골문자에도 남아 있을 만큼 그 역사가 장구하다. 우리나라 내시 제도는 조선에 와서 체계화된다. ‘경국대전’은 내시부 임무와 품계에 관해 명시했다. 내시는 선발 시험을 치르고 대궐로 들어온다.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는 견습 내시를 거쳐 정식 내시가 되면 내시부에 소속돼 대전과 왕비전, 세자궁, 빈궁 등에서 음식물 감독, 왕명 출납, 궁궐 문지기, 궁궐 청소 업무를 했다. 관리의 상가를 조문해 왕 대신 부조하거나 궐 밖으로 왕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내시 품계는 문무관 체계와 동일하며 최고의 관직은 종2품 상선(2명)이었다.
내시는 가난과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는 방편으로 스스로 고자를 만들어 자원하는 사례가 많았다. 대한제국 성립기 직전까지도 여의도에 움막으로 된 고자시술소가 영업을 했던 것으로 구전된다. 내시는 생식 기능이 없었지만 어엿이 부인과 자녀를 거느렸다. 아내가 죽으면 재혼했고 첩까지 있었다. 생활고에서 벗어나고 왕실과 줄을 대기 위해 평민뿐 아니라 양반 가문 규수들도 서로 내시의 아내가 되고자 했다. ‘연산군일기’ 1496년(연산 2) 2월 2일 기사는 “궁궐의 일은 내시가 관장하고 있는데 이 무리들이 사족의 딸들을 데려다가 아내로 삼아 서로 통하게 되어 궁중의 비밀을 누설한다”고 했다.
내시 부인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많은 전토와 노비, 금은보화를 소유하며 풍요롭게 생활했다. 남편 품계에 따라 1품 정경부인(貞敬夫人), 2품 정부인(貞夫人) 등 높은 봉작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이 사내구실을 못하는 것에 불만도 없지는 않았을 터. 실록에 드물지만 내시 부인 불륜 사건이 등장한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도 “환자는 그것(생식기)이 흉하고 누추하여 실로 인류가 아니지만 장가들고 가정을 가져 보통 사람처럼 산다. 혹여 그 아내 되는 사람이 다른 접촉이 있을 때 유부녀의 실행(失行·간통)으로 죄를 주니 어찌 천리와 인정이라 할 것인가”라고 했다.
내시는 양자로 대를 이었다. ‘명종실록’ 1566년(명종 21) 8월 3일 기사는 “환자는 반드시 어린 환자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으며 많은 경우 4~5명에 이른다”고 했다. 양자가 되더라도 친가 성을 그대로 유지해 입양된 형제간에도 성이 모두 달랐다.
내시들은 어디에 살았을까. 내시 주거지로는 △종로구 효자동, 봉익동, 운니동, 계동 △서대문구 연희동, 가좌동 △은평구 신사동, 응암동, 진관동, 중흥동(고양 북한동) △중랑구 묵동 △고양 덕양구 용두동 △파주 당하동 △양주 장흥면 일영리, 광적면 효촌리 △구리 교문동 △남양주 화도읍 마석우리, 평내동, 차산리 △안양 동안구 관양동 △용인 삼가동 등이 있다. 효자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내시 집단 거주지였다. 처음에는 내시의 별칭인 화자(火者)들이 살던 동네라고 해서 ‘화자동’으로 불렸다가 음이 변해 효자동이 됐다고 전한다. 조선 전기 내시들의 관아인 내시부가 영추문 밖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것과 연관이 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아래 운니동과 봉익동에도 내시가 다수 살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내시부가 창덕궁 선정문(宣政門) 안 동쪽에도 있었다”고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창덕궁이 법궁으로 사용되면서 편전(왕의 집무 건물)인 선정전 옆에 내시부가 설치됐고 마찬가지로 그 주변에 내시들이 몰려 살았던 것이다.
내시의 묘지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 도봉구 쌍문동, 노원구 월계동, 중랑구 신내동과 고양, 양주, 남양주, 파주, 안양, 안산 등에 분포한다. 이말산과 함께 은평구 진관동 백화사 동편 북한산 자락에도 내시 묘(북한산 내시 묘역)가 존재했다. 중골마을이라고 했던 북한산 묘역에는 이사문을 파조로 하는 이사문공파 문중 분묘 45기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2012년 묘역이 매각되면서 모두 훼손됐다.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 자락의 청백아파트 주변에도 50여 개 내시 묘가 있었지만 1990년대 택지가 개발되고 청백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화장되거나 이장됐다.
궁녀는 내명부 소속으로 내시처럼 왕과 왕비를 지근에서 모시는 집단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내명부 품계 중 궁녀의 최고 직위는 내시보다 낮은 정5품 상궁(尙宮), 상의(尙儀)다. 궁녀들은 각 처소에 배치돼 왕실 의식주를 책임져야 해 내시보다 숫자가 많았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우리 조정에는 환관이 335명, 궁녀가 684명으로 이들이 받는 녹을 합쳐서 따지면 쌀이 1만1430석이나 된다”고 했다. 폭군 연산군 시기는 궁녀가 1000명을 넘기도 했다.
궁녀들은 가난과 사주팔자 등 특별한 사연에 의해 궁궐로 들어오지만 선발 조건은 까다로워 선조 중 중병을 앓거나 죄지은 자가 없어야 했다. 10세 전후에 입궁해 15년이 경과하면 관례(冠禮)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며 다시 15년이 지나야 여관 최고직인 상궁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의 승은을 입으면 20대에도 상궁이 됐고 이 경우 승은상궁으로 호칭했다. 승은상궁들이 왕의 자식을 낳게 되면 종4품 숙원(淑媛) 이상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내시들은 가정이라도 있지만 궁녀들은 구중궁궐에 갇혀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불미한 일도 적지 않았다. ‘정조실록’ 1776년(정조 즉위년) 12월 9일 기사에서 정조는 “여름 사이 중관(내시)이 이른바 방자나인(房子內人·궁녀의 종)이라는 것들과 은밀히 통간한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며 “죄상을 밝혀 율대로 처분하라”고 명했다.
궁녀들은 나이가 많거나 병에 걸려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출궁했다. 은평구 수국사(구산동 314) 부근에 ‘궁말’이 있었고 이곳에 조선 말까지 궁궐에서 물러나온 궁녀들이 20~30가구 거주했다고 한다. 간혹 기상이변이 있을 때도 결혼하지 못한 여인의 한이 하늘에 닿았다고 인식해 궁녀를 방출했다. 숙종 11년(1685) 2월 29일 한재로 궁녀 25명을 출궁시켰고, 영조 26년(1750) 9월 5일은 비가 너무 내려 45명을 뽑아 내보냈다.
퇴직한 궁녀들은 죽어 주로 친정 선영에 묻혔다. 이말산의 옥구 임씨 임 상궁(1635~1709) 묘와 임실 이씨 이 상궁 묘, 은평노인복지관 뒷산의 상궁 김해 김씨 묘,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의 상궁 밀양 박씨 묘, 고양시 정발산에 있었던 상궁 안동 김씨 묘 등은 모두 아버지와 선조 묘가 있는 선산에 자리 잡았다. 이 중 임 상궁은 숙종의 여동생 명안공주(1665~1687)의 보모상궁(왕자·왕녀 양육을 맡은 나인의 책임자)을 했고 공주는 그런 임 상궁을 이모로 대했다.
내시와 궁녀의 신분은 중인 이하 하층민이었다. 엄격한 신분제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바꿨던 그들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까.
참고 문헌
1.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경국대전, 연려실기술(이긍익), 신증동국여지승람, 성호사실(이익)
2. 은평의 내시·궁녀, 박상진, 은평향토사료집 19, 은평문화원, 2021
3. 은평 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