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북한은 올해 두 척의 5000톤급 구축함을 진수했습니다. 4월 25일 남포조선소에서 ‘최현호’가 진수식을 가졌고, 6월 12일엔 나진조선소에서 두 번째 구축함 ‘강건호’가 진수했습니다. 강건호는 앞선 5월 21일 함북 조선조선소에서 김정은이 참가한 진수식 도중 넘어져 화제가 됐던 군함입니다.
이들 구축함들이 어느 정도의 무장을 하고, 어떤 성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자력 항해를 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북한은 5000톤급이나 되는 군함을 자체로 만들었다는 것을 대내외에 널리 자랑하고 싶은가 봅니다. 실패한 강건호 진수식을 포함해 모두 세 차례의 진수식에 김정은이 참가해 밤늦게까지 대대적인 경축 공연을 펼쳤습니다.
한국은 구축함이나 잠수함에 역사적 인물이나 국가에 공헌한 인물의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함께 했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붙이기로 한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올해를 시작으로 매년 같은 배수량의 구축함을 두 척씩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 내년엔 또 다른 이름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북한이 평양에 조성한 대성산혁명열사릉엔 모두 140여 명의 항일 투사들이 묻혀 있는데, 이 중 15명의 반신상은 김일성의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중심으로 열사릉의 제일 꼭대기에 특별하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15명을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꼽으면 림춘추, 최현, 최용건, 김경석, 류경수, 안길, 김책, 김정숙, 강건, 최춘국, 오중흡, 최희숙, 김일, 오백룡, 오진우입니다. 그러니 내년부터 만들어질 군함의 명칭은 예상이 되는데, 가령 안길이나 오중흡의 이름이 선정되겠죠.
열사릉이 만들어진 때는 1975년으로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입니다. 즉 김일성이 직접 뽑은 특별한 15인입니다. 그런데 이 15명 중에서도 김정은은 최현을 1번으로 뽑았고, 강건을 2번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 방탕아의 대명사 최현과 아들들
최현은 1907년에 길림성 훈춘 현에서 홍범도 부대의 일원이었던 최득권의 아들로 태어나 1984년 75세에 사망했습니다. 최현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5년 중국 군벌에게 체포돼 1932년까지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출소 후 최현은 연길 유격대에 입대했고, 연대장까지 했습니다.당시 빨치산 연대는 많을 땐 200명까지, 적을 땐 100명 미만으로 구성됐습니다. 최현 부대는 용감했고 싸움을 잘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하지만 용감성과는 별개로 최현은 죽을 때까지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일성을 넘진 못했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이 1940년대 초반 소련으로 들어가 88독립여단으로 개편됐을 때, 김일성은 대위로 1대대장을 맡았고, 최현은 상위로 중대장을 맡았습니다.
88독립여단 시절 김일성과 같은 대위급이었던 조선인은 1대대 정치위원 안길, 2대대 정치위원 강건(본명 강신태), 3대대 정치위원 김책이었습니다. 참고로 여단장과 정치부여단장엔 중국인인 주보중과 이조린이 임명됐습니다.
해방 후 북한으로 돌아온 최현은 1948년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 여단장을 맡아 한국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6·25전쟁 직전 처벌을 받아 강등됐다가, 전쟁이 시작된 뒤 2사단장, 2군단장을 지냈고, 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민족보위성 부상, 1958년 체신상, 1969년 민족보위상, 1976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사망할 때까지 유지했습니다.김일성보다 나이가 5살이 많았던 최현은 사석에서 김일성에게 말을 놓는 인물이었습니다. 김일성을 “일성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일성은 최현에 대해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 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불같은 성격을 지닌 그는 무식하지만, 우직한 충성심으로 김일성의 독재와 아들로의 권력 세습을 적극 도운 인물입니다.
1956년 8월 노동당 내의 연안파와 소련파 계열 세력들이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장에서 김일성의 유일 독재에 반발하자, 최현은 권총을 뽑아 들고 회의장에 들어가 “당장 쏴 죽인다”고 호통을 쳐 반대파들을 진압했다고 합니다.
또 1972년 김일성이 자신의 환갑잔치에서 “누가 내 뒤를 이으면 좋겠냐”고 말하자, 최현이 앞장서서 “당연히 장남이 해야 한다”고 김정일을 밀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세습은 큰 반발을 부르는 민감한 일이고, 최용건 등 김일성의 빨치산 전우들도 반대했지만, 최현이 앞장서서 아들 세습으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김정일로의 세습에 큰 공로를 세운 최현은 자신도 세습의 열매를 배 터지게 따먹었습니다. 최현의 두 아들은 북에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성골’이 됐습니다.
최현은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부친입니다. 최현은 빨치산 시절에 김철호와 결혼해 최룡택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38여단장 시절 일본군 간호사 출신인 여성과 바람을 피워 1950년 1월 최룡해가 태어났습니다.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한 처벌로 전쟁 전 최현은 처벌을 받았는데, 전쟁 뒤 김철호가 최룡해를 거두어 함께 키웠습니다.
최현의 적자인 최룡택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1942년생으로 알려진 최룡택은 김정일과 함께 자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사생아인 최룡해는 형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최룡택은 노동당 3대혁명소조지도부 과장을 오랫동안 지내다가 2000년대 초반 뇌출혈로 쓰러져 물러났습니다. 그가 과장일 때, 부장은 장성택이었습니다. 장성택도 빨치산 적자 최룡택 앞에선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김정일은 최룡택에게 원하는 요직은 다 주겠다고 했지만, 최룡택은 거절하고 3대혁명소조지도부 과장으로 쭉 있었습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김정일은 1973년 3대혁명소조운동이란 것을 시작해 대학 졸업생들을 3년 동안 현장에 파견했고, 뛰어나게 활약하는 사람은 노동당에 입당시켰습니다.
최룡택의 자리는 20대 초반인 전국의 여대 졸업생들을 쥐락펴락하는 위치였던 것입니다. 서류를 통해 예쁜 여대생을 골라내 자기와 잠자리를 함께 하면 입당을 포상으로 주었습니다.
최룡택의 기행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최룡택은 북한에 단 한 대뿐인 빨간색 벤츠를 타고 다녔는데, 늘 어린 여성들을 태우고 전국으로 놀러 다녔습니다.
최룡택이 입에 올랐던 유명한 사건 중 하나가 1990년대 중반 강원도당 사건이었습니다. 최룡택은 강원도 원산의 총련휴양소 3각을 자기들의 아지트로 삼고 장성택 등을 불러 엽기 행각을 벌였는데, 이것이 김정일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김정일은 경고의 의미로 최룡택의 시중을 들었던 강원도당 조직비서 등 고위 간부 11명을 총살했고, 노리개가 됐던 여성들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끌어갔지만, 주범인 최룡택과 장성택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최룡해도 형 못지않은 엽기 행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최룡해는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 위원장을 맡았는데, 이 자리 역시 젊은 여성들을 쥐락펴락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전국의 미녀들을 뽑아 청년협주단이란 명목으로 기쁨조를 만든 뒤 방탕한 술자리로 밤을 새웠습니다. 변태적 성욕을 위해 여성들의 이를 다 뽑게 했는데, 이 한 개를 뽑는 대가로 200달러씩 주었습니다.
이것 역시 김정일에게 보고 됐지만, 최룡해는 잠깐 혁명화를 갖다 오는 데 그쳤습니다. 농락당했던 협주단 여성들만 청진 수성에 있는 25호 관리소에 끌려가 죽음을 맞았습니다.
부전자전입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최현은 해방 후 많은 여성을 마구 건드리면서 “우리가 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이 정도도 못 하냐”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후계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김정일은 간호비서란 명목으로 젊은 여성들을 빨치산 출신들에게 공급했는데, 최현도 죽기 전까지 전국의 경치 좋은 별장을 다니며 젊은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실컷 놀다가 죽었습니다.
최현이 빨치산에서 싸운 공은 인정한다고 쳐도, 해방 된지 80년째 되는 올해까지 본인과 아들들은 북한을 마적처럼 타고 앉아 세습해 가며 방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최현은 북한 정권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친동생 부부를 죽인 강건
최현이 원 없이 방탕하다가 죽었다면, 강건은 일찍 죽어 그와 비교가 되는 인물입니다. 강건은 경북 상주에서 1918년에 태어나 1928년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습니다. 본명은 강신태였는데, 이후 강건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새로 고친 이름은 가나다순으로 정하는 명단에 늘 먼저 올라갑니다.
강건은 16세 때인 1933년 한 살 아래인 동생 강신일과 함께 유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소년 형제들은 부대를 이끌고, 만주군에게 체포된 영안유격총대 대장 이형박을 구출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강건은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고, 승진도 빨라 88독립여단에서 대위 계급을 받았습니다. 해방 후 북한군 초대 총참모장을 맡았는데, 1950년 9월 8일 32세에 사망했습니다.
전쟁 발발 한 달 뒤인 7월 27일 한국군 참모총장인 채병덕 소장이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다가 경남 하동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는데, 북한군 총참모장도 낙동강을 넘으려다가 죽은 것입니다. 강건은 고향 바로 옆인 경북 안동에서 차가 대전차 지뢰를 밟는 바람에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그의 죽음과 관련해선 여러 설이 있습니다.
강건은 매우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친동생과 그의 임신한 아내를 자기 손으로 교수형에 처한 사람입니다.
이는 1980년대 중국에 생존한 항일 빨치산 출신자들을 인터뷰했던 유순호 작가의 저서 ‘김일성’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938년 강건은 주보중 휘하에서 5군 3사 9연대 정치위원으로 있었고, 한 살 아래의 동생 강신일은 8연대 정치위원을 맡고 있었습니다. 1938년 여름 5군은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많은 전사자를 냈습니다.
그런데 8연대엔 5군에서 예쁘기로 소문이 났고, 춤과 노래를 잘 부르는 이생금이란 여대원이 있었습니다. 1938년에 이생금은 16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결혼을 했었는데, 남편이 그만 원정 도중 전사했습니다.
강신일은 여대원을 위로하다가 그만 사랑에 빠졌습니다. 같은 전우인 남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치위원과 미망인이 동거하기 시작하니 이는 말밥에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이 일로 처벌을 받을 위험에 처하자, 강신일은 자신을 따르는 조선인 부대원들과 함께 도주했습니다. 그렇다고 일제에 투항한 것은 아니고, 흑룡강성 동북부에 있는 쌍압산시 집현현에 가서 무장투쟁을 계속했고, 북만 지구 재만한인조국광복회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1939년 가을 형 강신태의 부대가 집현현 일대에서 식량을 구하다가, 강신일이 3군 9연대의 이름을 여전히 걸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강신태는 9연대 주력부대를 데리고 강신일의 부대를 습격했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강신일과 이생금을 잡은 뒤 처형하겠다고 펄펄 뛰었습니다. 증언자들은 이때 이생금이 임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강신태는 “부대에서 도주한 자가 바로 내 친동생이기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다”며 동생을 반드시 죽인다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와 함께 있던 8연대 1중대장 왕경운, 4군 유수처 지도원 조서염 등이 나서서 “일본군에 투항한 것도 아니고,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있으니 일단 상부에 데리고 가서 의견을 들어보자”고 말렸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강신일과 부인 이생금을 총살도 아닌,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선 해방 후 중국에 살았던 왕경운, 3사 정치부 주임 왕효명, 당시 17세였던 3사 8연대 1중대 소속 여대원 오옥청 등 여러 증언자가 있습니다.
강신일은 오늘날 중국 쌍압산시 인민정부에서 ‘쌍압산의 항일영웅 강신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 이생금도 역시 항일열사로 기록돼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자료에는 강신일과 이생금의 죽음에 대해 “특정한 환경하에서 어쩔 수 없이 빚어졌던 착오적인 결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강신태-강건은 고작 32세에 남침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강창주라는 아들을 남겼는데, 강창주는 군단장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은 1956년에 그의 이름을 딴 강건군관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이 학교는 이후 많은 북한군 장교들을 양성했는데, 오늘날엔 그 이름이 강건명칭 종합군관학교로 바뀌었습니다. 올해 2월 강건명칭 종합군관학교를 시찰한 김정은은 교내에 있는 강건 동상 앞에 헌화하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잔혹한 강건의 업보인지, 오늘날 강건군관학교 사격장은 잔인한 처형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강건군관학교는 평양시 외곽인 순안공항 인근에 있는데, 학교 주변에 넓은 전술훈련장이 있고, 훈련장 안에 길이 100m, 너비 60m 정도인 사격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진행된 공개 처형에 대한 증언은 참으로 많습니다. 1980년 2월 북한의 최고 미인이라고 알려졌던 영화배우 우인희를 비롯해, 수많은 고위 간부들이 처형됐습니다.
대표적 인물로 실패한 화폐개혁의 희생양이 돼 2010년 처형당한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 김정은이 참가한 회의에서 졸았다가 2015년 처형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장성택의 심복들이던 리룡하 노동당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노동당 행정부 부부장, 이설주의 과거사를 언급했다가 처형된 은하수관현악단 단원 12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개 처형은 목격자가 많습니다. 한국에도 강건군관학교 사격장에서 직접 공개 처형을 목격했던 탈북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김정은 시대 들어 이곳에서 4신 고사총 처형도 이뤄진다는 증언도 나옵니다. 그래서인지 북한 사람들은 이곳을 ‘고위층의 무덤’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친동생 부부를 목을 매달았던 강건의 업보 때문일까요. 강건은 오늘날에도 잔인한 처형과 더불어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됐습니다. 심지어 올해엔 그의 이름을 딴 구축함조차 바다도 나가기도 전에 넘어져 여러 사람을 죽게 했으니, 강건은 정말 죽음을 부르는 이름인 듯합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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