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배터리 업계가 북미 전기차 수요 감소의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 업체와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거나 합작 공장을 설립하기로 한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들은 잇달아 기존 계획 변경을 통보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한 후 전기차 보급 속도가 예상보다 더딘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국내 배터리 업체는 상대적으로 전기차 수요가 견조한 유럽 시장과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에서 활로를 모색 중이다.
◇ 북미 계약 재논의 나선 배터리 3사
18일 산업계에 따르면 SK온과 일본 닛산자동차는 2028년 시작할 예정이던 99.4GWh 규모 배터리 공급 계약을 재검토 중이다. SK온이 닛산 미국 미시시피주 캔턴 공장에 배터리를 공급할 예정이었지만, 최근 해당 공장의 전기차 생산 계획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SK온이 일본 완성차 업체와 체결한 첫 계약이다. 계약 규모만 15조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닛산은 2028년부터 4종의 전기차를 미국에서 생산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올해 출시 차량의 40%를 전기차로 전환하고 2030년까지 이 비율을 60%로 끌어올리겠다는 방침도 세웠다. 하지만 닛산의 전동화 전환 속도는 예상보다 느리다. 닛산은 부품 업체에 캔턴 공장에서의 전기차 생산 계획을 철회할 예정이라고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SK온과 닛산은 기존 계약을 놓고 재협의에 나설 예정이다.
SK온 외 국내 배터리 업체들도 미국 시장에서 맺은 계약 이행이 불투명해지는 등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 미국 인디애나주에 설립한 배터리 조인트벤처(JV) 스타플러스에너지(SPE) 청산을 검토 중이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추진하던 5조원 규모의 배터리 합작 공장은 추진 방향을 놓고 논의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스텔란티스와 캐나다 JV인 넥스트스타에너지(NSE) 지분을 정리했다. 일본 혼다자동차는 LG에너지솔루션과 미국 오하이오주에 건설한 전기차 배터리 합작 공장도 하이브리드카 또는 ESS용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 전기차 수요 둔화 중인 美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 공급 계약을 재검토하고 나선 것은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이 기대를 밑돌았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 미국 내 순수 전기차(BEV) 판매량은 전년 동기보다 28%가량 감소한 21만2600대로 파악됐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출시를 목표로 했던 전기차 라인업 비중도 축소하고 나섰다. 최근 미국 포드자동차는 전기 SUV 출시 계획을 축소하고 스텔란티스는 당초 예고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 출시를 취소했다. 지난해 10월 미국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한 영향이 크다.
자동차 정책 방향도 내연기관 규제를 완화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추진한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 강화 시점을 2년 연기하는 방안을 최근 추진하고 있다. 미국 전기차 판매 약세로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수익성이 악화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앞서 바이든 행정부는 전기차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2027년형 소형차와 중형차 모델의 자동차 오염물질 배출량을 기존 대비 50~70%가량 감축하도록 강제했다.
국내 배터리 업체는 유럽 등 다른 시장에 힘을 쏟고 있다. 미국·이란 전쟁 이후 고유가 직격탄을 맞은 유럽 시장에서는 전기차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유럽연합(EU)에서 판매된 차량 중 순수 전기차 비중은 19.4%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4.2%포인트가량 상승한 것이다. 지난 3월 SK온 배터리를 장착한 유럽 전기차 판매량도 전년 동기 대비 2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미 지역에서 ESS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점도 분위기 반전에 나설 기회 중 하나로 꼽힌다. 미국 내 인공지능(AI) 사용량이 폭증하면서 전력 수요가 급증한 결과로 풀이된다. 미국 태양광산업협회에 따르면 미국 ESS 누적 설치량은 2030년 최대 700기가와트시(GWh)에 달할 전망이다. 2024년(83GWh)과 비교하면 약 8.4배로 늘어난 수치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미국에서 전기차 판매량이 다소 둔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전기차 보급 확대는 불가피한 흐름으로 보고 있다”며 “대체 시장을 발굴하고 ESS 수요에 대응하며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인 수주 확대로 국내 기업의 실적 개선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1분기 실적 부진 털어낼 것"…배터리 3사, 하반기 반전 노린다
고유가 장기화·ESS 수요 증가 힘입어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가 올해 1분기 부진한 실적을 이어갔다. 전기차 수요 둔화와 중국 업체가 저가 배터리를 앞세워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크게 높여 입지가 좁아진 결과다. 배터리 3사는 북미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 증가와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고유가 장기화를 등에 업고 올 하반기 실적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올해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5% 감소한 6조7227억원이다. 또 2078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전 분기 영업손실이 1220억원이던 점을 감안하면 최근 적자 규모가 더 커졌다. LG에너지솔루션은 독일 BMW에 10조원 규모의 전기차용 원통형 배터리를 공급하기로 해 분위기 반전을 노리고 있다. 계약 기간은 최장 10년으로 연간 10기가와트시(GWh) 물량을 공급할 것으로 전망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ESS 사업 확대에도 나서 실적 반등을 이끈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 지난 3월 제너럴모터스(GM)와의 합작법인 얼티엄셀즈 미국 테네시 스프링힐 공장 전기차 배터리 라인 일부를 ESS 생산용으로 돌리기로 했다.
삼성SDI는 올해 1분기 매출 3조5764억원, 영업손실 1556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영업손실을 축소한 점은 긍정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 내 ESS 판매와 값비싼 원통형 배터리 공급을 늘린 게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SDI는 지난 20일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에 수조원대 전기차용 배터리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삼성SDI 관계자는 “2분기에도 경영환경 불확실성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하반기 분기 흑자 전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SK온은 올해 1분기 매출 1조7912억원, 영업손실 3492억원을 기록했다. 배터리 3사 중 영업손실이 가장 컸지만, 북미 지역 판매량 증가와 유럽·아시아 지역 판매량 회복세로 전 분기보다는 적자 폭이 줄었다. SK온은 ‘제2차 ESS 중앙계약시장’ 입찰에서 물량 기준 총 565MW(메가와트) 중 284MW를 수주해 50.3%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SK온 측은 “향후 ESS 사업 도약 발판을 마련하고 후속 입찰에도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배터리업계에서는 올해 하반기 실적 개선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한다. 고유가 부담이 글로벌 전기차 구매 심리를 개선할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정상원 기자 top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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