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배우는 자립, 남자들의 조리교실[정성갑의 공간의 재발견]

1 day ago 8

예바라기 음식연구가와 남성 수강생들이 함께 만든 제철 음식을 살펴보고 있다. 정성갑 대표 제공

예바라기 음식연구가와 남성 수강생들이 함께 만든 제철 음식을 살펴보고 있다. 정성갑 대표 제공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음식연구가 예바라기(예명) 선생님을 모시고 남성반을 꾸려 음식 수업을 받은 지 2년이 됐다. 한 달에 한 번,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선생님 집에 모여 제철음식을 예닐곱 가지 배운다. 한번에 배우기엔 많은 가짓수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밑손질을 해 놓고 나물무침이나 된장찌개처럼 비교적 뚝딱 할 수 있는 메뉴를 포함하면 그리 벅차지도 않다. 저마다 직업도, 나이도 다른 성인 남성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반짝이는 눈으로 이것저것 열심히 물으며 음식을 배우는 모습은 내가 봐도 사랑스럽다.

지난 시간에는 묵은지횟쌈과 고사리·루콜라샐러드, 오징어실채볶음과 오가피무침 등을 배웠다. 간단하고 맛도 좋은 메뉴들이었다. 그중 베스트를 꼽으라면 묵은지횟쌈이다. 조리법이랄 것도 딱히 없다. 광어회를 떠 와 맛있게 익은 묵은지를 곁들이고, 입맛에 따라 찍어 먹을 수 있게 된장과 간장만 곁들이면 끝이다. 한입에 쏙 들어가도록 손으로 쥐어 만든 밥에 묵은지와 광어회를 올리고 된장이나 간장을 곁들여 오물오물 씹다 보면 천국이 따로 없다.

음식을 배우는 시간이지만 공부하듯 치열하게 하지는 않는다. 음식이 돼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이맘때 어떤 식재료가 있는지 익히고, 맛있게 먹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낀다. 아내는 배워 왔으면 집에서 좀 만들어 보라고 채근하지만, 완벽한 행복을 맛보고 온 터라 딱히 무언가를 더하고 싶지 않다.

게으른 학생은 나뿐인 것 같고 다들 실습도 열심히 한다. 1등은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A 매니저님. 메모도 꼼꼼히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마트에 들러 수업시간에 배운 식재료를 다 사 간다. 김치까지 담글 정도니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대학 재단에 있는 우리 반 맏형님도 열심히 한다. 언젠가는 수삼튀김을 해 봤다며 완성된 사진을 카톡방에 올려 박수를 받았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배우자의 사랑과 환호, 가정의 평화와 행복에 일조한 것 같아 내심 뿌듯하다.

내가 음식 수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와 목적은 자립이었다. 신혼 때 빠듯하게 살림을 꾸렸던 아내는 “마음 편히 시장을 본 적이 없다. 비싸고 좋은 식재료는 턱턱 살 수 없으니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그때 음식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나는 내 밥을 안 챙기는 아내가 그렇게 서운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밥은?” 하고 묻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아내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지만 내 밥을 정성 들여 챙기지는 않는다. 이런 일로 몇 번 부부싸움을 한 적도 있다. 그 끝에 남은 것은 묘한 부끄러움이었다. 나도 성인이면서 밥, 밥 하는 게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젠 김밥도 말고 된장찌개도 끓이고 파김치와 깍두기도 담그는 남자가 됐다. 만세.

지난달에는 예바라기 선생님을 모시고 스승의 날 기념 식사도 했다. 우리의 자립을 도와준 고마운 선생님. 자립이라고 썼지만 내가 홀로 설 수 있어야 가족 간의 동행도 가능하지 싶다. 남자들의 공간이라고 하면 으레 서재나 오디오룸 등을 떠올리는데, 주방이나 쿠킹클래스도 자연스럽게 입에 오르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