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칼럼] B급 민간화폐, 200년 만의 재등장

14 hours ago 1

[백광엽 칼럼] B급 민간화폐, 200년 만의 재등장

초기자본주의 시절 수많은 은행이 제각각 ‘은행권’을 찍었다. ‘중앙은행권’은 없었다. 19세기 한때 미국에선 35개 주에 3089개 은행권이 유통됐다. ‘자유은행 시대’로 명명돼 있다. 요즘 한국으로 치면 서울은행권, 춘천은행권, 울릉도은행권 등이 한국은행권을 대신한 격이다.

은행권은 말하자면 ‘B급 민간화폐’다. ‘A급 공공화폐’ 중앙은행권보다 기능과 가치에서 열등하다. 발행 은행의 존속이 전제돼야 해서다. 그 시절 모든 은행권은 액면가 이하로 할인거래됐다.

좋은 화폐제도의 최소 요건은 ‘단일성’(singleness)이다. 여러 화폐가 공존할 순 있지만 모두 액면을 유지해야 한다. 액면이 무너지는 화폐로는 안전한 계약이 어렵고 경제 혼란은 필연이다.

자유은행 시대에 뱅크런이 무한 반복된 주요 이유다. 그 숙명을 탈피하려 고안한 금융안전망이 중앙은행 제도다. 국가 보증 화폐를 무제한 공급하는 최종 대부자의 등장에 뱅크런은 확 줄었다. 예금자보호 제도도 같은 맥락이다.

근자의 스테이블코인 열풍은 여러 측면에서 두 세기 전 자유은행 시대의 은행권을 연상시킨다. 블록체인이라는 낯선 외양이지만 본질과 속성이 유사해서다. ‘1코인=1달러’로 설계한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대부분 미국 국채로 준비자산을 쌓는다. 미국 민간은행권이 주정부 채권을 담보로 발행된 것처럼.

‘불안정한 민간화폐’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안정적인 코인’을 표방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기실 ‘불안정한 통화’다. 그 불완전성은 지급결제 기능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지급과 결제는 한 묶음으로 취급되지만 엄연히 구분된다. 지급은 거래를 일으키는 행위다. 결제는 누구나 신뢰하는 법화로 정산을 보장해 거래를 완결하는 절차다. 은행권과 스테이블코인은 공히 약정액 결제를 담보하지 못한다. 요즘 가장 핫한 스테이블코인 서클도 2년 전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 당시 ‘1코인=0.88달러’까지 추락했다. ‘언제나 법화로 상환된다’는 믿음이 의심받는 순간 ‘코인런’이다.

디지털·무(無)국경·비밀주의가 특징인 스테이블코인의 압도적 파장은 그 시절 은행권과 비교 불가다. 달러 코인이 글로벌 범용성을 확보한다면 국내 지급결제시장 원화 수요는 비례적으로 타격받을 것이다. 통화주권의 문제다.

맑은 공기가 건강한 삶에 필수이듯 건전한 통화제도는 선진 경제의 요체다. 훅 불어닥친 광풍은 그래서 논쟁적이다. 코인 발행이 ‘화폐 창출’에 다름 아니라는 점부터 그렇다. 누군가 1억원을 코인회사에 예치하면 시중 통화는 2억원으로 불어난다. 코인 1억원이 발행되고, 예치금 1억원도 국채매수 등을 통해 시중으로 회귀한다. 디지털 통화 창출의 시뇨리지(화폐주조차익)가 민간에 귀속되는 구조도 논란이다. 코인사업자가 보유 국채에서 얻는 무위험 이자 수입이 시뇨리지 성격을 갖는다.

스테이블코인은 통화 관리를 난해한 고차방정식으로 만든다. M2는 물론이고 어떤 광의의 통화량에도 안 잡힌다. 코인사업자는 더 큰 시뇨리지를 위해 더 많은 코인을 발행하려는 유인이 분명하다. 안정적 통화가치에 목마른 다른 경제주체들의 이해와 상충한다.

갑론을박에도 트럼프의 미국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내달린다. MAGA용 국채 수요 확보가 절실하고, 천문학적 재정·무역적자로 위협받는 통화패권을 연명하려는 생존권적 선택이다. 달러 기축체제를 덮친 중대 변화에 대한 이재명 정부의 해법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육성이다. 달러 코인과의 맞짱을 외치며 급진적 입법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국뽕’ 차오르는 구상이지만 실현 가능성을 등한시한 정치적 결정의 혐의가 짙다. ‘자유코인 시대’가 오면 한국 금융소비자도 원화 아닌 달러화 코인을 선호할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EU, 중국이 달러 스테이블코인 역내 발행·유통을 제한하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이유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미래 지급결제 시스템으로 스테이블코인을 경계하고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를 제안한다. 바이든의 미국도 그랬다.

리스크와 한계가 뚜렷한 데도 ‘중앙’이 없는 B급 민간화폐에 세계가 열광하는 이유? 기존 통화시스템과 의사결정권자들에게 바벨탑처럼 쌓인 불신을 빼놓고 논하기 어렵다. 코인 열풍을 곱씹어 볼수록 딜레마적 비관론으로 빠져든다는 점, 그게 근원적 두려움이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