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마켓in 송재민 기자] 퇴직연금 시장에 로보어드바이저(RA) 일임계약이 허용된 지 반년 가까이 흘렀지만, 현장의 반응은 여전히 미지근하다. 제도적 문은 열렸지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은행들이 ETF 중심의 리밸런싱 상품을 적극적으로 내놓지 않는 이상 로보어드바이저는 반쪽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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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챗GPT) |
1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증권사들은 기존 전산 체계 덕분에 ETF 기반 RA 운용이 비교적 원활하다. 반면 은행권은 상황이 다르다. 하나은행이 지난 3월 파운트투자자문과 손잡고 금융권 최초로 퇴직연금 RA 일임 서비스를 선보였고, NH농협은행도 AI 기반 퇴직연금 서비스를 내놨지만 ETF 활용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은행권이 소극적인 가장 큰 이유는 전산 인프라 부족과 수익성 한계다. 증권사와 달리 은행은 ETF 실시간 거래 시스템이 미비해 규제 완화 이후에도 개발부터 시작해야 했다. 무엇보다 ETF 기반 RA는 은행 입장에서 ‘돈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하다. ETF 자체 보수가 낮은 데다, RA 운용 수수료를 과도하게 올릴 수 없어 실질적으로 남는 수익이 크지 않다. 예금처럼 예대마진이 발생하는 구조도 아니어서 은행 입장에서는 매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행뿐만 아니라 보험·증권을 포함한 기존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기본적으로 다 반대하는 입장”이라며 “수익성이 낮고, 이미 기득권을 쥔 상태에서 굳이 판을 흔들 이유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보수적인 투자자들의 성향도 걸림돌이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은 계약형 제도가 중심이라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해야 한다. 그간 법적으로 전문가에게 위임할 권리가 제한돼 왔기 때문에, 대다수 가입자들은 원리금 보장 상품만 골라왔다. RA 일임계약이 허용되면서 이 제약을 풀어 전문가에게 운용을 맡길 수 있도록 했지만, 은행권은 여전히 “고객이 보수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도입을 늦추는 분위기다.
남 연구위원은 “최근 보험 쪽에서 증권으로 머니무브가 많았고,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가입자들은 보수적 성향이 강한 편”이라면서도 “은행이 움직이지 않으면 RA 활성화 자체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권 교체 과정서 정책 드라이브 약해져 하지만 업계 전문가들은 은행권의 진짜 속내가 ‘기존 판을 깨고 싶지 않아서’라고 꼬집는다.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연금부문 대표는 “은행들은 ETF 기반 RA는 수익성이 낮고, 기존 시장 질서를 흔들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로보어드바이저는 원래 위험 관리, 개인 맞춤형 자산 배분, 거래 자동화라는 장점을 살려야 한다”라며 “특히 ETF 기반일 때 AI가 시장 변동에 따라 냉정하게 리밸런싱을 수행하며 안정적 운용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정권 교체 과정에서 정책적 드라이브가 약해진 점도 한몫했다. 로보어드바이저는 윤석열 전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지난해 정부의 혁신금융서비스로 RA일임형 서비스가 지정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이후 동력이 사라지자 시장은 금세 식어가는 분위기였다.
다만 최근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다. 정부가 퇴직연금 기금화 논의에 다시 힘을 싣자 은행권도 선제 대응에 나서는 모습이다. KB국민은행은 핀테크 기업 디셈버앤컴퍼니와 손잡고 RA 일임 서비스를 단독 출시했으며, 신한은행과 우리은행도 자산운용사·핀테크 기업과 손을 잡고 하반기 출시를 준비 중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은행권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며 “최근 일부 은행을 중심으로 RA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온다는 점은 기대할 만하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