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염색단지가 세계 최고 노하우를 갖췄다고 인정받는 배경은 30~40년된 숙련공의 노하우다. 우선 면과 양모, 나일론, 폴리에스터 등을 섞는 ‘혼방률’에 따라 염색제를 다르게 써야 한다. 레시피대로 염색제를 넣더라도 온도·습도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기 일쑤라, 염색제를 몇 차례에 걸쳐 넣을지, 얼마나 휘저을지가 품질을 좌우한다. 이는 콕 집어 정량화하기가 어렵다. 대구 염색단지는 전문가의 ‘암묵지(暗默知)’가 작동하는 대표적 산업현장이지만, 고령화와 청년의 3D업종 기피 현상으로 점점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조선소 ‘철판 곡가공’은 두꺼운 철판에 열을 가해 구부리는 어려운 작업이다. 미세하게 다른 철판의 두께, 재질, 당일의 기온과 습도에 따라 열을 가했을 때 팽창하고 수축하는 정도가 다르다. 수십년간 이분야에서 근무한 베테랑 작업자는 철판이 달궈질 때의 색깔과 망치질 소리만 듣고도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는 설명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공장 자동화가 진행중이지만, 수식으로 계산하기 매우 까다로운 영역”이라고 말했다.
산업名匠 노하우, AI로 보존
산업통상부가 이런 근로현장의 암묵지를 수집해 데이터화하는 작업에 나선다. 숙련 제조인력의 경험과 노하우를 인공지능(AI)으로 보존하고 발전시켜 제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려는 차원이다.
산업부는 28일 ‘제조암묵지 기반 AI모델 개발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인다고 발표했다. 고령화와 숙련 인력들의 은퇴가 가속화하면서 제조 명장들의 암묵지가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는 판단이다. 올해 추경 예산으로 총 480억원의 국비를 투입해 ‘제조 암묵지의 데이터셋 구축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시급성과 파급효과가 큰 30개 과제를 선정해 1년 동안 과제당 16억원씩 지원한다. 제조기업과 AI기업이 손을 잡은 컨소시엄을 지원 대상으로 한다. 데이터셋을 만들고, AI모델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자금뿐만 아니라 컨설팅·장비구축 등을 포함해 제조 AI 전환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에 종합지원하기로 했다.
산업부는 사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기업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와 함께 전국 주요 권역을 돌며 순회 설명회를 열기로 했다. 어떤 암묵지가 있는지를 정량화하는 의미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번 사업은 우리 제조업의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추진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암묵지가 지배하는 세계 일류 제품
염색공정과 선박 곡가공 뿐만이 아니다. K제조업을 이끄는 조선, 철강, 화학부터 반도체까지 ‘베테랑 작업자’가 쌓아온 노하우가 핵심적 기술력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
조선업계에선 LNG 운반선에서 쓰이는 특수용접이 대표적 암묵지의 사례라고 설명한다. 영하 163도의 극저온을 견뎌야 하는 LNG 화물창 용접은 아주 미세한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동 용접기가 도입되었음에도, 복잡한 구석이나 연결 부위는 여전히 숙련공의 손길을 거친다. 업계 관계자는 “용접봉을 움직이는 속도, 각도, 그리고 불꽃의 튀는 모양을 보고 용융 풀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능력은 수십 년의 경험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 공장의 설비 유지보수도 숙련공의 손길이 필요하다. 수천 대의 장비가 돌아가는 팹 안에서 특정 장비의 수율이 미세하게 떨어질 때가 있다. 이는 수치 데이터상으로는 정상 범위 내에 있을때가 많다. 숙련된 엔지니어는 장비가 구동될 때 발생하는 미세한 진동이나 소음의 변화를 통해 부품의 마모 상태를 예측한다. 공정 중에 화학 물질의 비율이나 압력을 아주 조금씩 조정하는 ‘튜닝’ 작업도 숙련공의 몫이다. 표준 매뉴얼이 있지만, 일반 공정 내 상태나 이전 공정에서의 미세한 오차를 감안해 최적의 값을 찾아내는 것은 베테랑 엔지니어의 ‘감’에 의존한다는 설명이다.
대표적 소부장 분야인 정밀 금형 연마도 베테랑 기술자의 몫이다. 스마트폰 외관이나 렌즈를 찍어내는 금형은 거울처럼 매끄러워야 한다. 기계로 1차 가공을 한 뒤, 마지막 마이크로 단위의 오차를 잡는 것은 사람의 손끝 감각이라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도 결국엔 숙련공의 감각에 의존한다”며 “손바닥으로 금형 표면을 쓸어 넘기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굴곡을 찾아내 깎아 내는 건 데이터화하기 어렵다”고 했다. 일본 무라타 제작소는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제조 공정에서 세라믹 파우더와 유기 용제를 섞는 핵심 공정을, 도레이첨단소제는 탄소섬유 제조 공정에서 숙련된 기술자의 감각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日 블랙박스 작전으로 암묵지 보호
일본 소부장 기업들은 이러한 암묵지를 보호하기 위해 독특한 ‘블랙박스’ 전략을 취하고 있다. 특허 출원하면 기술이 공개되므로, 아예 특허를 내지 않고 공장 내부의 비밀(영업비밀)로 간직하는 것이다. 핵심 장비를 자체적으로 제작하고, 숙련공은 정년 퇴직 후에도 재고용하는 등 인적 자원을 철저히 관리하기도 한다.
한국도 산업명장 제도 등을 통해 ‘암묵지’를 보존, 전수하려는 조력을 하지만, 단절되는 사례가 잦다. 2010년대 중반 조선업 불황으로 수만 명의 숙련공이 떠난 게 대표적 사례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 자체는 세계 최고지만, 핵심 장비는 일본이나 네덜란드산이 많다. 산업계 관계자는 “장비가 고장 나거나 최적화가 필요할 때마다 원천 기술을 가진 외국 엔지니어에게 의존하다 보니, 장비를 다루는 깊이 있는 암묵지가 내재화하지 못한 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대구 염색단지 사례처럼, 금형이나 열처리 같은 기초 공정에서 ‘눈빛만 봐도 온도를 맞추는’ 장인들이 점차 은퇴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청년층의 기피로 기술 전수가 끊기면서, 기업들은 암묵지를 계승하기보다 ‘적당한 품질’의 자동화 기계로 대체하는 방안을 택했고, 이는 결국 초격차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암묵지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에 나선건 이런 이유에서다. 산업부 관계자는 “데이터화해서 누구나 쓸 수 있는 AI로 만드는 방식이 제조업의 초격차 경쟁력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노동계 "암묵지는 근로자 몫"
정부는 암묵지 데이터셋 사업이 은퇴를 앞둔 베테랑들의 노하우가 ‘공중분해’ 되지 않도록 '디지털 저장소'에 가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염색, 용접, 금형 등 소위 '감각'이 지배하던 공정을 AI 모델로 구축해 숙련공이 은퇴하더라도 암묵지가 남아 공장의 생산성이 하락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AI 데이터셋이 구축되면 베테랑마다 조금씩 달랐던 ‘감’을 최적화하는 의미가 크고, 세계 일류 수준의 균질한 제품을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산업부는 이 사업이 김정관 장관의 주력 정책인 ‘제조 AI전환(MAX)’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단순히 기계를 돌리는 자동화를 넘어, 숙련공처럼 상황에 맞춰 스스로 판단하고 공정을 조정하는 AI 모델이 도입된다면 공장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어서다.
반대로 이 사업이 진행된다면 노동 구조가 질적으로 바뀔 가능성도 크다. 제조 현장을 인간이 아니라 AI 기술 집약적 일터가 되고, 인간의 역할을 그만큼 줄어든다는 점에서다. 한국노총 등 노동계는 암묵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수십 년간 축적된 노동자의 숙련 기술을 데이터화하는 과정에서 ‘지식의 소유권’과 ‘이익 배분’이 기업에만 쏠릴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나섰다. 한국노총은 정부 암묵지 사업에 대한 입장문에서 “제조 명장의 경험과 직관, 판단을 데이터로 전환해 AI가 이를 대체·재현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노동의 성격과 현장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책”이라며 “숙련의 권리, 고용 영향, 책임 구조 등 핵심 쟁점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사회적 논의 없이 사업이 추진돼선 안된다”고 했다.
정부도 노동계의 이런 입장이 일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과거부터 일하는 숙련도는 사람에 대한 성과 보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 장관은 전날 기자단 브리핑에서 “제조 암묵지 전수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문제가 아니라, 안 하면 산업 자체가 사라지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라며 “이해관계자 모두와 긴밀히 소통해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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