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마미아!' 20년 호흡 최정원·김문정, 1000번의 무대 뒷이야기

2 weeks ago 1

스토리만 보면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평생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란 딸은 결혼을 앞두고 엄마의 과거 연애사를 파헤친다. 곧바로 세 명의 '아빠 후보'를 한자리에 소집하고 결혼식 때 함께 입장할 '진짜 아빠' 찾기에 나선다. 올해로 21주년을 맞은 뮤지컬 '맘마미아!'의 간략한 줄거리다.

뮤지컬 '맘마미아!'의 한 장면./사진=신시컴퍼니

뮤지컬 '맘마미아!'의 한 장면./사진=신시컴퍼니

'맘마미아!'는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내용만 놓고 보면 다소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우리에겐 스웨덴 전설의 팝 그룹 아바(ABBA)의 노래와 배우 최정원(56), 그리고 김문정 음악감독(54)이 있으니 말이다.

올해로 데뷔 36년차인 최정원은 배우 인생의 절반을 주인공 '도나' 역으로 살았다. 섬세한 감정과 절절한 목소리로 딸 '소피'를 홀로 키워낸 도나 역을 책임졌다. 2004년 국내 초연부터 함께한 김문정 감독 역시 지휘봉을 잡는 동시에 독보적인 건반 연주를 선보이며 무대를 아바의 음악이 흐르는 그리스의 외딴 섬으로 단숨에 옮겨놓는다.

지난달 말 '맘마미아!'가 공연 중인 LG아트센터에서 두 주역을 만났다. 이들 사이엔 함께 한 시간만큼 자매 같은 친밀감이 엿보였다. 뮤지컬계의 대선배이자 소피 또래의 딸을 둔 '두 명의 도나'가 들려준 인생 뮤지컬 이야기를 대화 형식으로 풀어봤다.

뮤지컬 '맘마미아!'의 배우 최정원과 음악감독 김문정이 지난달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최혁 기자

뮤지컬 '맘마미아!'의 배우 최정원과 음악감독 김문정이 지난달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최혁 기자

아바 노래가 울림을 주는 이유

김문정(이하 문정) "언니가 '맘마미아!'에 합류한 게 2007년 재연 때였잖아. 그때 언니가 서른아홉이었고. 생각해보면 여자 배우로서 큰 결심을 했던 것 같아. 더 젊은 배역을 맡을 수도 있었는데, 스무 살 딸을 둔 도나 역을 한거잖아."

최정원(이하 정원) "난 그냥 아바의 노래가 너무 좋았어. 어렸을 때부터 가수를 꿈꾼 도나도 너무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오디션 영상을 영국에 보냈는데 도나 이미지랑 너무 잘 맞는다고 하는거야.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 시즌도 빠지지 않고 무대에 섰더니 어느덧 1300회를 바라보고 있네."

뮤지컬 '맘마미아!'의 배우 최정원과 음악감독 김문정이 지난달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최혁 기자

뮤지컬 '맘마미아!'의 배우 최정원과 음악감독 김문정이 지난달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최혁 기자

문정 "한국 관객들이 아바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도 따로 있는 것 같아. 노래는 분명히 신나는데 'Voulez-Vous'나 'Gimme! Gimme! Gimme!' 같은 노래는 메이저(장조)가 아니라 마이너(단조)라서 은근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거든. 북유럽의 춥고 어두운 기운에서 나오는 디스코풍 노래가 한국인이 가진 '한(恨)'의 정서랑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정원 "'맘마미아!'의 가장 큰 묘미는 가사라고 생각해. 팝송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라마와 잘 연결되고 한국 정서에도 딱 들어맞잖아. 도나가 힘들어 할 때 친구들이 '치키티타(스페인어로 젊은 여성), 왜 그러니'('Chiquitita'의 가사)를 부르고, 결혼식 전에 소피의 머리를 빗겨줄 땐 '자꾸 클 수록 내 곁에서 멀어져갔어'(Slipping through my fingers'의 가사)를 부르는데, 이게 전부 영어 가사를 그대로 옮긴 거란 게 신기해서 매번 감탄하면서 불러."

도나 역의 배우 최정원과 딸 소피 역의 최태이./사진=신시컴퍼니

도나 역의 배우 최정원과 딸 소피 역의 최태이./사진=신시컴퍼니

딸한테서 힘을 얻는 워킹맘

'맘마미아!'에 수록된 아바의 히트곡 22곡 중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노래는 'Slipping through my fingers'(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네)다. 도나가 결혼식을 하루 앞둔 소피의 머리를 빗겨주며 부르는 곡으로,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허전한 마음이 진하게 묻어난다.

정원 "우리가 연습실에서 늘 울던 멤버잖아. 딸 둔 엄마들이 꼭 휴지를 찾더라고. 나도 도나처럼 내 딸이 결혼하면 어린 시절 딸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갈 것 같아. 실제로 소피 또래의 딸도 있고, '타냐'랑 '로지'와 같은 친구들도 있으니까 무대에 설 때 억지로 연기하는 게 아니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모든 게 흘러나오는 것 같아."

뮤지컬 '맘마미아!'의 배우 최정원과 음악감독 김문정이 지난달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최혁 기자

뮤지컬 '맘마미아!'의 배우 최정원과 음악감독 김문정이 지난달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최혁 기자

문정 "맞아. 우리가 '맘마미아!'를 사랑하는 이유는 작품과 함께 성장하기 때문인 것 같아. 30대 초반에 음악감독을 맡았을 땐 내가 결혼 초기라 소피 입장에 가까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딸을 둔 엄마의 입장에서 작품을 보게 되더라고."

정원 "아바의 음악이기도 하지만 한국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노래 같아. 일하는 엄마들이 자식한테 느끼는 미안함도 반영될 수 있고. 그런데 사실 난 딸한테 미안해하진 않았어. 딸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는 대신 '너도 크면 네가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하라'고 말했거든."

문정 "내 둘째 딸은 어느 날 그러더라.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갔는데 '엄마가 집에 있어서 너무 좋다'는거야. 근데 바로 뒤에 한 말이 '이 시간에 엄마가 집에 없는 게 멋있다'는 거였어. 그 말 덕에 내가 당당해질 수 있었는데 도나도 비슷한 것 같아. 소피가 'Slipping through my fingers'에서 '엄마가 정말 자랑스러워요'라고 말했을 때, 도나도 당당해질 수 있는 힘을 얻은거지. 그래서 바로 다음 노래(Winner takes it all)에서 슬립만 걸치고서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잖아."

배우 최정원과 앙상블./사진=신시컴퍼니

배우 최정원과 앙상블./사진=신시컴퍼니

커튼콜로 에너지 충전
'맘마미아!'는 한국 뮤지컬 시장이 지금처럼 성장하지 않았던 시기에 해외에서 들어왔다. 이때문에 한국 스태프들과 영국 오리지널 팀이 처음 만나며 벌어진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문정 "'초연 때 'Super trouper'(무대 조명 장치명이자 수록곡 제목)를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오늘밤 끝내주네'로 한다는거야. 오리지널 팀은 가사에 영어를 아예 쓰지 않아야 한다는 방침이더라고. 그런데 가사가 너무 이상하니까 우리도 'Super trouper'를 안다고, 그냥 영어로 해도 된다고 설득해서 지금처럼 영어로 쓸 수 있었어."

정원 "우리가 영어 뜻을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네. 반대로 오리지널 팀 아이디어가 좋았던 것도 있어. 하루종일 일하는 도나가 전혀 꾸밀 수 없는 상황인데 화장을 짙게 하는 건 어색하잖아. 오리지널 팀 말대로 자연스러운 화장이 도나 캐릭터에 어울리는 것 같아. 안 꾸민 상태에서 전 남친 세 명을 만나는 당황스러운 설정이니까…."

문정 "맘마미아지!" (동시에 웃음)

뮤지컬 '맘마미아!'의 커튼콜 장면. 왼쪽부터 타냐 역의 홍지민, 도나 역의 최정원, 로지 역의 박준면./사진=신시컴퍼니

뮤지컬 '맘마미아!'의 커튼콜 장면. 왼쪽부터 타냐 역의 홍지민, 도나 역의 최정원, 로지 역의 박준면./사진=신시컴퍼니

'맘마미아'의 절정은 관객과 배우가 모두 일어나 리듬에 몸을 맞기는 커튼콜 시간이다. 공연 내내 박수만 치던 관객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앵콜'을 외치며 열광한다.

정원 "제일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은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커튼콜 때야. 세 곡을 부르는 그 시간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 무대에서 공연하는 내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것처럼 행복한 기분이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도 의미있고. 지금까지 무대에 서기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문정 "난 공연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번아웃이 왔었는데 '맘마미아!' 관객들을 보고 싹 사라진 적이 있어.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였는데, 어떤 노부부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내가 보기에 '맘마미아!'가 인생 첫 뮤지컬인 분들 같았어. 공연 내내 박수도 잘 안 치시던 분들이 커튼콜 때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추시는거야. 그걸 보니까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지 뭐야. '아, 나 아직도 공연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공연하는 이유가 이런 거였지' 하고 다시 느끼게 되더라고."

정원 "1000번 넘게 해온 공연이지만 매번 똑같다고 느껴지진 않더라고. 삶의 여러 변화를 겪다보면 어떤 가사에서 감정적으로 북받쳐 눈물이 나기도 하잖아. 이런 게 내가 매너리즘에 빠질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 매번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어렸을 때보다 감정의 폭도 깊어졌어."

올해로 18년째 뮤지컬 '맘마미아!'에서 도나 역을 맡은 배우 최정원. 사진=최혁 기자

올해로 18년째 뮤지컬 '맘마미아!'에서 도나 역을 맡은 배우 최정원. 사진=최혁 기자

인터뷰가 끝나고 김문정 감독은 음악감독 답게 'Thank you for the music'(음악이 있음에 난 감사해)을 좋아하는 곡으로 꼽으며 자리를 떠났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분장실로 들어선 최정원 배우는 현실로 튀어나온 도나 그 자체였다. "세상에서 커튼콜을 제일 잘하는 '도나'랍니다. 공연장에서 만나요!"

글=허세민 기자, 사진=최혁 기자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