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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욱 메리츠증권 연구원
파괴보다 혁신: SaaSpocalypse 공포 속에서 ‘HALO’와 인프라로 회귀하는 시장 투자자들이 “AI가 모든 것을 재편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HALO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AI가 재편하는 속도 자체가 물리 인프라의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AI가 소프트웨어를 집어삼키려면 결국 전력·메모리·네트워크라는 현실의 병목을 통과해야 한다. HALO는 이 병목을 ‘방어’하는 산업이자, 동시에 병목을 해소하는 ‘공급자’라는 점에서 단순한 방어주 테마와 결이 다르다. 이 과정에서 토큰 사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결국 추론량(inference)이 곧 매출이 되는 구조가 강화된다. 이때 기업들이 진짜로 고민하는 것은 “더 많은 AI를 쓰자”가 아니라, “단위 연산량당 비용을 어디까지 낮출 수 있나”이다. 비용을 낮추는 주체가 아키텍처(칩·네트워크·전력·냉각·소프트웨어 스택)라면, 단기 승자는 소프트웨어 ‘표면’이 아니라 인프라 ‘뼈대’를 쥔 쪽에서 나올 확률이 높다. 기업용 소프트웨어 세계에서는 Specialist(기존 SaaS)와 Generalist(통합 에이전트/플랫폼)의 경쟁이 본격화되며, 데이터의 의미 계층을 장악하고 여러 시스템을 ‘통역’하는 플레이어가 더 높은 밸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결국 소프트웨어 투자는 “AI에 대체될까?”라는 감정 질문이 아니라, 과금 모델 전환 속도, 데이터/워크플로우의 락인 구조, 성장성과 수익성의 동시 충족이라는 체크리스트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다만 그 부가가치가 숫자로 확인되기까지의 구간에서 시장은 인내심을 잃기 쉽고, 지금 그 자금은 HALO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AI의 다음 성장 국면을 여는 열쇠 역시 HALO—즉 메모리·전력·네트워크 같은 물리 인프라의 확장이다. 결국 지금의 방향성 부재는 침체가 아니라, 새 질서로의 자본 재배치가 계속 진행되는 과정 중 하나일 수 있다.
미국 주식시장은 몇 달째 방향성을 찾지 못한 채 흔들린다. 지수만 보면 답답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무엇이 살아남는가”를 두고 선명한 재배치가 진행 중이다. 최근 IT주 시장을 관통한 키워드는 SaaSpocalypse—AI 에이전트가 SaaS·결제·컨설팅·사이버보안까지 대체하며 산업 구조를 뒤흔들 것이라는 공포였다. 그러나 공포가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한 가지 사실이 더 분명해졌다. 시장이 두려워하는 것은 ‘AI’가 아니라, AI가 만들어낼 새로운 가치(Value Added)를 아직 숫자로 보기 어렵다는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은 밸류에이션을 누르고, 밸류에이션 하락은 “방향성 부재”라는 형태로 지수에 드러난다.
하지만 기술 사이클의 역사는 대체로 다른 결말을 보여왔다. PC와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사무직이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지만, 장기적으로는 생산성 향상과 신규 시장의 탄생이 더 큰 경제적 과실을 만들었다. 전자상거래가 오프라인을 ‘전멸’시킬 것처럼 보였던 시기에도 유통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소비가 사라지지 않았다. AI 에이전트 역시 마찬가지다. “파괴”는 뉴스가 되지만, 경제는 결국 “혁신이 만든 부가가치”로 확장된다. 문제는 혁신의 과실이 어디에서 먼저 숫자로 잡히느냐인데, 현재 시장은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인프라에서 그 실마리를 더 빨리 확인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HALO(Heavy Assets, Low Obsolescence)’가 부각된다. 수명이 길고 교체주기가 긴 물리 자산 기반 사업—전력망, 파이프라인, 통신망, 방산 플랫폼—은 AI가 당장 대체하기 어렵고, 현금흐름의 변동성도 상대적으로 낮다.
지수가 오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시장 내부의 “중심축”이 예전처럼 하나로 묶여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한때는 Magnificent 7의 동조화가 지수 방향을 결정했다면, 지금은 시총 상위주 내부에서조차 실적과 수익성, AI 비용(연산·전력·인력) 부담에 따라 차별화가 강화되고 있다. 더 나아가 상장 시장 밖에서 비상장 초거대 기업들의 몸집이 커지며, 자본과 관심이 IPO 기대감으로 흡수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상장 시장의 소프트웨어가 흔들리는 순간에도 비상장 AI 프론티어의 밸류가 커지는 장면은, “창조 없는 파괴”라기보다 성장 산업으로의 자본 이동에 가깝다. 즉, 시장은 AI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AI 가치사슬의 ‘현금화 구간’을 다시 배분하고 있다.
AI 에이전트 국면이 본격화될수록 이 재배분은 단기적으로 하드웨어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 에이전트가 촉발하는 변화의 핵심은 “연산량의 폭증”이다. 단순 챗봇이 질의응답을 하는 수준을 넘어, 에이전트는 브라우저를 탐색하고, 코드를 실행하고, 여러 단계의 업무를 계획·수행·검증한다.
이 흐름은 의외의 곳에서도 확인된다. 로컬에서 ‘행동하는 소프트웨어’를 구동하려는 수요가 늘면서, 통합 메모리 아키텍처처럼 큰 공유 메모리 풀을 효율적으로 쓰는 장치에 관심이 몰리고, 고메모리 구성의 리드타임이 길어지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에이전트 시대의 직관은 명확하다. AI는 똑똑해질수록 데이터를 더 오래 붙잡고 있어야 하고, 더 많이 읽고 써야 한다.
그렇다고 소프트웨어가 모두 ‘피해주’로 남지는 않을 수 있다. 다만 평가의 기준이 바뀐다. 좌석 수(seat) 기반 과금은 에이전트가 인간의 좌석을 대체하는 순간 취약해진다. 반대로 사용량(usage) 기반 과금은 “사용자는 줄어도 사용량은 유지 혹은 증가”할 수 있다는 논리로 방어된다.
정리하면, ‘SaaSpocalypse’는 AI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AI가 어디에서 먼저 돈이 되는지를 시장이 재평가한 과정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혁신은 파괴를 동반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부가가치를 더 크게 만든다.

3 week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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