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삶은 굳건… 슬픔에서 기쁨을 편집할 수 있어 감동”

1 day ago 5

‘인생’ 등 집필 中소설가 위화, 산문집 ‘산곡미풍’ 국내 출간
“기억은 우리 과거를 수정하고 있어
글을 쓰는 것도 내가 기억을 택한 것
울고 웃다 마지막에야 잃는게 기억”
인간의 욕망 담은 신작도 中서 출간

산문집 ‘산곡미풍’을 펴낸 중국 소설가 위화. 그는 “어쩌면 제 어린 시절 기억을 당분간 다 써버렸는지도 모르겠다”며 “‘인생’의 푸구이와 ‘허삼관매혈기’의 허삼관에겐 현실의 원형이 있지만, 그건 수백, 수천 명이 모여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푸른숲 제공

산문집 ‘산곡미풍’을 펴낸 중국 소설가 위화. 그는 “어쩌면 제 어린 시절 기억을 당분간 다 써버렸는지도 모르겠다”며 “‘인생’의 푸구이와 ‘허삼관매혈기’의 허삼관에겐 현실의 원형이 있지만, 그건 수백, 수천 명이 모여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푸른숲 제공
한 노인이 늙은 소를 몰며 밭을 간다. 노인 이름은 푸구이(福貴). 그는 소에게도 이름을 붙여준 뒤, 굽이굽이 지나온 삶을 들려준다. 재산도, 가족도, 젊음도 잃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상하리만치 온기를 잃지 않는다.

1993년 발표된 중국 소설가 위화(余華·66)의 대표작 ‘인생(活着)’은 그렇게 시작된다.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영화화한 이 작품은 1994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로부터 30여 년. 이번엔 푸구이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냈다. 5월 국내 출간된 산문집 ‘산곡미풍(山谷微風)’(푸른숲)에서다. ‘허삼관매혈기’ ‘형제’ 등을 통해 오랫동안 타인의 삶과 중국 사회를 그려온 작가가 이번엔 그의 어린 시절을 꺼내 들었다. 최근 동아일보 서면 인터뷰에 응한 위 작가는 “이 책이 나를 다시 한 번 살게 해줬다”고 했다.

●“기억은 언제나 과거를 수정한다”

위 작가는 2024년 베이징을 떠나 중국 남단의 도시 싼야(三亞)로 이주했다고 한다. 겨울이면 관광객으로 붐비는 지역이다.

“싼야는 겨울엔 매우 활기차지만 나머지 세 계절은 아주 조용합니다. 그 세 계절이 바로 제 계절입니다.”

그는 “집에 전화도, 휴대전화도 없던 30여 년 전이 자주 그립다”고 했다. “지금은 소통이 너무 편리해졌고,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도 너무 많아졌다”는 얘기다. 이에 번잡한 도시를 떠나 조용한 시간을 얻은 뒤,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산문을 쓰게 됐다고.

‘산곡미풍’엔 가난과 결핍의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고난의 씁쓸함보다 포근한 온기가 더 짙게 남는다. 초교 1학년 때 처음 캐러멜 냄새를 맡았던 기억, 형이 기절한 통에 사탕 한 봉지를 얻어먹었던 기억 등등. 한국 만화 ‘검정 고무신’ 속 기영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위 작가는 이 책이 사실 그대로의 회고록은 아니라고 했다.“이 산문들을 쓰며 새롭게 깨달은 게 있다면, 제가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억은 언제나 우리의 과거를 수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어서, 과거에 겪었던 좌절과 고난도 오늘날 회상해 보면 흔히 웃음과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다”며 “기억은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마지막에야 잃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라고 했다.

●“인간 본성 또 다른 각도에서 현실 표현하고 싶어”

산문집 말미에 등장하는 장면은 위화의 이런 ‘기억론’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초교 2학년 때 한 동급생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친구는 책가방을 멘 채 학교 운동장에서 흐느꼈다. 그때 위 작가와 친구들은 탁구를 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울고 있는 친구를 불러 함께 탁구를 쳤다. 친구는 첫판을 이기자 울음을 그쳤고, 두 번째 판을 이기자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내 기억 속에서 울릴 때마다 나는 삶의 굳건함에, 삶이 슬픔에서 기쁨을 잘라내 편집할 수 있음에 감동한다.”(‘산곡미풍’에서)

고향 바다를 회상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교과서에선 바다를 파랗다고 배웠지만, 어린 위화의 눈에 비친 바다는 누런색이었다. 어느 날 멀리 헤엄쳐 나갔을 때 비로소 초록빛 바다를 만났다고 한다.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심지어 짧은 영상을 볼 때도 ‘이 사람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나와 다르구나’ 깨닫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순간은 저를 돌아보는 계기이자 배움의 시간이죠. 세상이 풍요롭고 다채로운 이유는 각자의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산문집은 단순한 유년 회고록에 멈추지 않는다. 기억이 어떻게 삶을 다시 써 내려가는지를 보여준다. 위 작가는 “다른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다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 그것이 제가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기대하는 바”라고 했다.

위 작가는 현재 집필 중인 시리즈 ‘혼단열전(混蛋列傳)’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중국에서 출간된 제1부는, 내년 상반기에 국내 출간될 예정이다. 제목은 직역하면 ‘개자식 열전’ 또는 ‘망나니 열전’ 정도. 현지에선 욕망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혼단’을 전면에 내세워 현대 중국 사회를 그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조차 낯설게 여길 만한 각도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진실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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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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