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기와 LG이노텍의 생산라인 일정부터 파악해 오세요.”
최근 글로벌 빅테크 하드웨어 설계팀 사이에서 일상이 된 말이다.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인공지능(AI) 반도체 기판인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 같은 부품을 제조하는 이들 기업의 생산 일정을 확인하는 것이 핵심성과지표(KPI)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과거에는 완제품 기업이 부품사에 설계도를 주며 “기한과 단가를 맞춰오라”고 통보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부품사의 미세 공정 한계치를 모르면 빅테크의 AI 가속기 설계 자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엔지니어들이 한국 주요 부품사 공장 인근에 진을 치고, 부품사 엔지니어와의 ‘합숙 설계’를 자처하는 이유다.
글로벌 AI 공급망의 ‘갑을(甲乙) 방정식’이 바뀌고 있다. 한국 부품사들이 주문대로 찍어내는 하청 기지에서 AI 성능 한계를 결정짓는 병목 현상 해결사로 변신했다. 과거 스마트폰 공급망을 타고 급성장한 K부품사들이 10년 만에 AI 열풍을 타고 빅테크 위에 군림하는 ‘슈퍼을(乙)’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부품사 공정 모르면 설계 불가”
빅테크들이 한국 부품사에 줄을 서는 것은 AI 서버용 부품의 기술 난도가 임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전력 소모를 줄이고 발열을 잡는 기술이 AI 서버 성패를 가르면서 빅테크들은 설계 단계부터 부품사와 머리를 맞대는 커스텀(맞춤형)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이 FC-BGA를 설계할 때 빅테크 엔지니어들이 초기 단계부터 개입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부품사 제조 역량에 맞춰 회로를 그리지 않으면 수율을 잡지 못해 제품 출시 자체가 무산될 수 있어서다. 서버 제조사가 아무리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산더미처럼 쌓아둬도 한국 기업의 고성능 MLCC와 기판이 없으면 데이터센터를 완공하지 못하고 대기해야 하는 처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난 수십 년간 제조업계 바이블이던 ‘적기 생산 방식’(JIT·just in time)도 AI 시대엔 옛말이 됐다. 재고를 최소화해 효율을 극대화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일단 비축하고 보자”는 식의 재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핵심 부품 하나가 모자라 데이터센터 완공이 6개월 이상 지연되는 사태를 겪으며 빅테크의 구매 전략이 180도 바뀐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기의 고성능 MLCC와 LG이노텍 기판은 이제 ‘구하고 싶을 때 구할 수 있는 부품’이 아니다”며 “빅테크들은 부품사 공장 가동률을 실시간 확인하며 물량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하반기 풀가동”…가격 결정권도 주도
주도권이 부품사로 쏠리자 가격 결정권도 넘어오고 있다. 글로벌 고성능 MLCC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일본 무라타가 다음달 가격 인상을 예고하면서 삼성전기도 뒤따라 가격을 올릴 채비를 마쳤다.
공장 가동률은 90%를 넘어섰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올 하반기 기판 생산라인은 풀가동이어서 증설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문혁수 LG이노텍 대표도 지난달 “내년 하반기까지 기판 생산 능력을 두 배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중견·중소기업 몸값도 오르고 있다. AI 가속기용 고다층 기판(MLB) 시장을 장악한 이수페타시스는 엔비디아와 구글에서 동시에 러브콜을 받고 있다. 전장용 기판에 특화된 대덕전자, 최근 미국 마벨에 데이터센터용 MLCC 공급을 시작한 아모텍도 AI 낙수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AI 서버에서 시작된 K부품 열기는 자율주행과 로봇으로도 번지고 있다. 자율주행차의 눈 역할을 하는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용 카메라 모듈, 휴머노이드 로봇용 센싱 카메라를 확보하기 위해 테슬라 같은 자동차 회사와 로봇 업체들이 한국 기업에 줄을 서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 시대에 제조사 눈치를 보던 부품사들이 이제는 전 세계 빅테크를 상대로 가격을 부르는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강해령/김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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