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자들이 근무시간에 인터넷으로 쇼핑하고 유튜브를 봐도 신입 월급의 두세 배를 받아요. 의욕에 넘치던 신입사원이 입사 2~3년 만에 ‘시간만 때우면 나도 저만큼 받는다’고 자조하는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죠.” (40대 대학병원 사무직 과장 A씨)
한국 직장인은 주 43.9시간을 일하지만 이 중 10.6시간은 업무와 무관한 일을 하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근로시간 중 4분의 1이 ‘가짜 노동’시간인 셈이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2024년 9~10월 국내 근로자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이 조사를 바탕으로 지난주 논문을 발표한 서유정 연구원은 “가짜 노동시간(유휴시간)은 개인의 나태함 문제가 아니라 조직 설계와 문화의 산물”이라고 진단했다. 성과가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보상하는 낡은 시스템이 지속되는 한 장시간 근로와 낮은 노동 생산성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래 일하지만 덜 생산한다
산업화 시대의 보상 체계는 단순했다. 사업주 지휘·감독을 받으며 공장에서 일한 시간을 가치로 환산한 것이다. 생산하는 족족 물건이 팔리는 제조업 중심 체제에선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1953년 근로기준법이 그렇게 설계된 이유다. 2026년 한국 노동시장은 완전히 다르다. 30년 전(1996년) 22.7%이던 제조업 종사자 비중은 15.2%로 낮아졌다. 그 자리를 전문과학기술 서비스업(5.1%), 정보통신업(4%) 등이 채웠다. 기존 서비스업의 근무 방식도 정보기술(IT) 발달과 플랫폼산업 성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문제는 ‘근로시간이 곧 생산성’이라는 굴뚝 시대 ‘신화’가 여전히 일터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1865시간에 달한다. 2018년 1992시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OECD 38개 회원국 중 6위다. 반면 노동 생산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2024년 한국의 시간당 노동 생산성은 약 57달러로 OECD 회원국 중 31위다. ‘시간 때우기식 노동’이 근로시간은 늘리고 노동 생산성은 낮추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랜 관성에 근로자도 휴식을 돈으로 환산하기 시작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직장인 1946명을 상대로 조사해 지난해 발표한 ‘근로자의 연차휴가 사용 실태와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는 연차휴가 평균 14.7일 중 10.2일(69.4%)만 소진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미사용 사유 1위는 ‘연차수당을 받기 위해서’(14.7%)였다. 300인 이상 대기업에선 이 비중이 18.4%까지 올랐다. 반면 휴가 보상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소규모 사업장은 연차휴가 소진율이 높았다.
◇이름뿐인 유연근무제
노동계는 장시간 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정 근로시간을 단축하자고 주장한다. 주 4.5일제 도입이 대표적이다. 정부도 지난해 주 4.5일제를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다른 목소리가 나온다. 중견 제조업체 노무 관리자인 B씨는 “노조가 교섭에서 요구하는 건 근로시간 단축이 아니라 주말 특근을 확보해 달라는 것”이라며 “진짜 소득은 초과근무 수당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생산성과 관계없이 시간을 오래 보내야 돈이 나오는 구조가 장시간 근로의 진짜 이유”라고 말했다.
이광선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실근로시간은 그대로인데 법정 근로시간만 단축하자고 하면 결국 줄어든 시간만큼 연장근로 수당만 늘어날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실근로시간 단축이 성공하려면 시간 낭비를 줄이고 유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유연근무제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2024년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유연근무제 활용률(전체 근로자 대비)은 한 자릿수에 그친다. 시차출퇴근제 5.3%, 탄력근무제 4.4%, 선택적 근무시간제 3.8%, 재택 및 원격근무제 2.4% 등이다. 취업규칙을 바꾸려면 근로자 절반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데다 제도가 비현실적으로 복잡해서다. 예를 들어 탄력근무제를 쓰려면 단위기간(최장 6개월)을 설정하고 그 기간 내 주별, 일별 근로시간을 미리 특정해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거쳐야 한다.
◇“시간이 아닌 성과 중심 보상”
선진국은 경제 구조 변화에 맞춰 근로시간도 유연화하고 있다. 미국은 법정 근로시간이 없는 대신 높은 시간 외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연봉과 직무 성격에 따라 시간 외 수당을 주지 않아도 되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오래전부터 시행해왔다.
일본 역시 2019년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도입해 연구개발(R&D)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시간 제약 없이 성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한국은 반도체 R&D 종사자에 한해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노동계 반발로 무산됐다.
전문가들은 결국 시간이 아닌 성과에 따라 보상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넷플릭스 등 실리콘밸리 기업은 근무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는 대신 근로자 스스로 목표(OKR)를 정하도록 하고 해당 목표가 기업가치를 올리는 데 기여한 정도에 따라 보상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서 연구원은 “성과 중심 평가, 명확한 직무 정의, 인사 관리 체계 개선을 병행해야 시간당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곽용희/정영효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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