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명 공통의 식문화 젓갈
천대와 영광 공존하는 감칠맛
젓갈은 나라별로 ‘눅맘’(베트남), ‘이시리’(일본), ‘가룸’(로마) 등 다양한 이름을 가졌지만 고약한 냄새와 감칠맛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젓갈의 감칠맛은 생선의 단백질이 효소에 의해 분해되면서 나오는 글루탐산으로 생겨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암모니아, 트리메틸아민 등의 냄새나는 물질도 함께 만들어진다. 여기서 맛은 천상이되, 냄새는 지옥인 젓갈의 아이러니가 생긴다.
서양에서는 로마의 가룸이 대표적이다. 가룸은 올리브유, 와인과 함께 지중해 무역을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3대 교역품 중 하나였다. 로마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의 해안에 세워진 대규모 발효공장 ‘케타리아’를 만들었다. 대형 탱크에 생선을 가득 채우고 소금을 뿌려 수개월 동안 발효시킨 후 맑은 액젓인 가룸을 생산했다. 심지어 로마인들은 가룸을 이명이나 화상 부위에 바르고, 소화불량에는 먹는 등 약으로도 썼다. 젓갈 특유의 높은 염도와 항균 작용을 이용한 것이다.폼페이 유적에서도 가룸을 판매하던 상점이 발굴됐고, 암포라(운반 용기)에 적힌 라벨에는 제품의 등급과 산지가 꼼꼼히 기록돼 있었다. 고대 로마의 지식인 세네카는 이 귀족들이 즐기던 가룸을 “썩은 생선의 비싼 핏덩어리”라고 비꼬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산해진미를 즐긴 귀족들마저 냄새나는 가룸 없이는 식사를 하지 못한 상황을 보여준다. 로마의 평민들은 비싼 가룸 대신 작은 생선을 통째로 발효시켜 만든 ‘리콰멘’을 즐겼다. 젓갈의 매력에는 지위고하가 없었다.
젓갈과 식해, 두 갈래의 진화
한반도 서해안에서는 생선과 소금만으로 만드는 순수 염장 발효(새우젓·멸치젓 등)가, 동해안에서는 여기에 밥(곡물)을 더해 유산균 발효를 유도하는 식해(食醢)가 주류를 이룬다.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즐겨 먹는 가자미식해와 명태식해는 이후 고려인을 따라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 민물 농어류로 만든 ‘혜’라는 생선무침으로 이어졌다.
태국 북동부 문강 유역의 고고학 발굴에서는 기원전 700년∼기원전 500년경 무덤에서 젓갈로 담근 것으로 추정되는 생선 뼈가 발견됐고, 캄보디아에서는 메콩∼톤레사프 수계를 따라 형성된 발효어 유통망이 앙코르 왕조 시기부터 식량 체계의 근간을 이뤘다. 일본에서는 생선을 쌀밥과 함께 발효시키는 ‘나레즈시’(초밥의 조상)로 발전했으며, 오늘날에는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전해진 명란젓을 개량한 ‘멘타이코’가 대표 젓갈로 자리 잡았다.
동아시아에서 젓갈이 발달한 배경에는 쌀농사가 있다. 쌀농사는 약 8000년 전 중국 창장강 하류에서 처음 등장했다. 아열대 기후의 범람하는 충적지에 조성된 논에는 민물고기가 많이 살았다. 논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밥과 함께 항아리에 넣어 발효시킨 것이 이후 일본의 나레즈시, 태국의 쌀가루 발효 생선 ‘플라라’, 한국의 식해로 이어졌다. 쌀농사가 확산된 지역마다 이 쌀과 생선의 조합이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논은 물고기의 산란처가 되고, 수확기에 물을 빼면 물고기가 모여들어 대량 포획이 가능했다. 이 물고기는 발효를 거쳐 젓갈로 변하며 단백질과 소금의 공급원이 됐다.
신라-고려시대 젓갈의 발달중국에서는 한나라 시대 문헌에 이미 동이 지역의 생선 내장 젓갈이 등장하며, 이를 ‘오랑캐를 따르는 맛’이라는 뜻의 ‘축이(逐夷)’라고 썼다. 이는 서해안을 따라 동이계 젓갈 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에서 젓갈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7세기 신라다. ‘삼국사기’ 신문왕 3년(683년) 기록에는 왕비 간택을 축하하는 폐백 품목에 ‘혜(醯)’, 즉 젓갈이 포함돼 있었다. 젓갈은 쌀, 술, 된장, 포(건조 육류)와 함께 왕실 혼례를 장식한 고급 식재료였다. 경주 안압지(월지) 목간에도 ‘자(鮓)’와 ‘해(醢)’를 구분해 기록한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 궁중에서 이미 젓갈의 종류와 등급을 세밀하게 관리했다는 뜻이다.
마도 3호선이 운항되던 시기는 몽골의 침략과 지배가 본격화된 때였다. 약 30년에 걸친 침략과 약탈로 한반도 전역이 유린됐고,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뒤 환도하지 못한 채 몽골 쿠빌라이의 지원으로 복위한 원종이 왕위에 있었다. 유목민인 몽골인들은 생선 발효식품에 익숙하지 않았다. 양고기와 말고기, 마유주가 그들의 음식 세계 전부였다.
몽골의 간섭이 극에 달하는 상황에서도 남도 연안의 젓갈 종류는 늘었고, 지방 특산 젓갈을 중앙에 진상하는 체계도 정비됐다. 한반도 사람들에게 젓갈은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외세와 자신을 구분하는 ‘맛의 정체성’이었다. 이 흐름은 실제 항쟁으로도 이어졌다. 1270년 삼별초가 항쟁을 시작하며 전복젓과 새우젓을 실은 조운선이 강화의 왕과 권력자를 찾던 길을 따라 삼별초의 군선이 남하하며 바다는 젓갈의 통로에서 항쟁의 전장으로 바뀌었다.
한반도 정체성 세운 음식, 젓갈조선시대에 이르러 젓갈은 또 한 번 도약한다. 17세기 이후 고추가 전래되고 김장 문화가 본격화되면서 젓갈은 김치의 발효를 이끄는 핵심 재료로 자리 잡았다. 요즘 젓갈은 나트륨 과다 섭취에 대한 경계 때문인지 밥상에서 점차 비중이 작아지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이 증명하는 젓갈은 신석기인이 토기와 함께 발명해 낸 생존 기술이고, 로마가 지중해 무역으로 키워낸 문명의 상품이며, 고려가 외세의 지배 아래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정체성의 무기였다. 냉장고가 넘쳐나고 도처에 단백질 식재료가 널린 오늘날에도 우리가 새우젓을 찾고 멸치액젓을 넣는 것은 단지 습관이 아니라 수천 년의 기억이 몸에 새겨진 결과다. 당신 밥 위에 얹어진 젓갈에는 지난 수천 년간 한반도에서 생존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남아 있는 셈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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