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33개 민간 지역난방 업체에 기업 기밀인 원가 자료 공개를 의무화하려던 정부 계획이 사실상 무산됐다. 법적 근거가 없는 데다 민간기업의 원가 절감 노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반시장적 정책이라는 이유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규제개혁위원회가 시행을 보류했기 때문이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산업부가 7월부터 시행하려던 ‘지역난방 요금 고시 개정안’이 규제개혁위에서 막혔다. 변호사와 교수 등으로 구성된 10여 명의 민간 위원은 정부가 민간기업에 원가 자료 공개를 의무화하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정당성도 없다는 의견을 냈다. 원가를 공개하면 요금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이 민간기업의 원가 절감 노력을 없앨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는 앞서 민간 지역난방 업체에 “아파트 입주민 등에게 부과하는 난방료를 한국지역난방공사보다 최대 5% 낮게 책정하거나, 어렵다면 원가 자료를 의무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지역난방에 영업기밀 달라는 건 반시장 정책"
정부 "가격 낮추거나 원가 공개"…민간 지역난방에 양자택일 요구
지역난방은 열병합발전소에서 액화천연가스(LNG)를 태울 때 나오는 열이나 폐기물 처리시설 등에서 나오는 열로 물을 데운 뒤 가정에 공급하는 난방 방식이다. 한국지역난방공사가 지역난방을 이용하는 360만 가구의 절반을 맡고 33개 민간기업이 나머지를 책임지는 구조다.
요금은 회사마다 다르지만 기준은 있다. 민간기업은 지역난방공사 요금의 최대 110%까지 부과할 수 있다. ‘규모의 경제’를 갖춘 지역난방공사에 비해 민간업체의 원가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달 33개 지역난방 기업에 난방료를 지역난방공사보다 최대 5% 낮게 책정하라고 통보했다. LNG 발전을 많이 쓰는 지역난방공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연료비가 급등해 실적이 악화했지만 공장 폐열 등을 쓰는 민간 기업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산업부는 요금 인하를 압박하기 위해 “지역난방공사 요금보다 같거나 높게 책정할 경우 원가 산정 자료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폐열회수 단가, 주요 설비 개발·설치비 등 기업 기밀이 담긴 자료를 공개하라는 의미다. 그러자 지역난방 업체들은 “수익성이 좋아졌다는 이유로 요금 인하를 강제하면 중장기 투자가 불가능해진다”며 “원가를 공개하면 굳이 원가를 절감할 이유가 사라진다”며 반발했다.
기업들의 반발에도 고시 개정을 강행하던 산업부는 규제개혁위원회의 보류 결정으로 정책 방향을 틀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업계에선 산업부가 추진한 정책의 핵심 사안이 막힌 만큼 당분간 재추진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규제개혁위는 부처 차원에서 여는 1단계와 총리실이 주관하는 2단계로 나뉘는데, 지역난방 요금제도 개편안은 산업부가 위원을 선정한 1단계 벽도 넘지 못했다.
김진원/김우섭/성상훈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