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태어났을 때 문자는 평등한 선물처럼 주어져 있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한글을 떼던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모국어에 익숙해지는데, 그건 마치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문자는 단지 당연한 소통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신간 '문자 전파담'을 쓴 로버트 파우저는 이 책에서 문자에 담긴 의미를 깊이 사유하는데, 그에 따르면 문자는 시간을 초월한 공간과 근접한 도구다.
"모든 문자는 언어를 가시화한다. 언어를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게 하지 않고 '공간' 속에 남겨둔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글은 기록을 통해 특정한 공간 속에 남는다."
펜과 종이는 물질적인 공간을 이룬다. 문자가 기록되면 그것을 열어 읽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그 공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생각이 가시화된 공간을 거닐게 되고, 그 공간은 읽는 자의 심부에 또 하나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자의 첫 탄생은 어느 순간에 시작됐을까. 책은 고대의 시간으로 시곗바늘을 돌린다. 고대 문명에서 문자가 시작된 건 필연적이었다. 그 시작은 무역과 관련이 깊었다.
그 시절에도 한 도시와 다른 도시 간의 무역은 왕성했다. 이에 따라 기억을 관리하기 위해 문자의 탄생은 필연적이었다. 상대에게 물건을 팔고 이윤을 회수하기 위해선 품목과 수량을 기록하는 일이 필수적이었던 것. 우리가 기록의 역사를 들추면 시와 철학보다도 장부가 먼저였던 건 그래서일 것이다.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2만2000원문자의 또 다른 특성은 그것이 보수적이란 점이다. 집단의 기억에 의존해 언어 체계가 발흥하므로 한 번 만들어진 문자는 약속된 규범에 따라 잘 변하지 않았다고 이 책은 기술한다. 그런데 문자의 보수성을 바꾼 사례가 있으니 1443년 훈민정음 창제, 1928년 튀르키예 공화국의 문자 개혁이었다. 책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문자 체계를 의도적으로 바꾼 사례는 드물다"고 평가한다.
책은 문자의 전파가 제국의 흥망과 관련이 깊었다고도 본다. 하나의 사례가 소련 정부다. 1922년 내전이 끝난 뒤 소련은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강요하는 대신, 각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심지어 문자어 없는 시베리아 선주민들에겐 새 문자를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바뀌었고, 수많은 민족어는 키릴문자로 대체됐다.
이 책이 흥미로운 건 저자인 파우저가 다른 언어가 아닌 '한국어'로 책을 썼다는 점이다. 미국 출생인 그는 서울, 교토, 대전, 구마모토, 가고시마 등에서 살았고 한국어, 일본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중국어, 몽골어, 라틴어, 북미 선주민 언어를 모두 습득했다. 6년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로도 재직했다. 한 인간의 내면에 깃든 국경 없는 삶이 책 곳곳에 투영돼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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