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트럼프 출생시민권 제한 제동… “국가의 약속” vs “자동 인증서 아냐”
트럼프 “의회가 끝내야”… 재심도 추진
법무부는 원정 출산 조직 집중 수사
임신부 입국 제한 등 ‘플랜 B’ 부상… 11월 중간선거 앞 이민전쟁 새 불씨

이날 대법원 인근에서 만난 메릴 씨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는 공화당원이자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라고 밝히면서도 “그래도 대통령이 행정명령 하나로 누가 미국민인지까지 마음대로 정하려는 건 월권”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정반대의 목소리도 나왔다. 메릴랜드주에서 왔다는 제임스 오언 씨는 “미국에 잠깐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시민권을 받는 제도가 정상적인지 지금이라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시민권이 미국 병원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동 발급되는 인증서는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누구나 미국인인가, 아니면 부모의 국적과 체류 자격도 시민권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하는가. 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불붙인 이 질문에 대해 130년 가까이 이어진 출생시민권 원칙을 이번에 재확인했다. 다만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당장 현행 출생시민권 제도에 회의적인 미국인이 적지 않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판결 이후 오히려 싸움의 무대를 헌법 해석에서 비자 심사 및 입국 통제, 의회 입법으로 옮기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중국계 청년이 연 美 시민권의 문
이번 논쟁을 이해하려면 15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계 이민자 부부의 아들 웡 킴 아크가 태어났다. 부모는 미국 시민이 아니었지만 미국에 거주하며 생업에 종사했다. 웡 킴 아크는 성인이 된 뒤 중국에 다녀왔다가 미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다. 당시 미 정부는 부모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그 역시 미국 시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웡 킴 아크는 미국에서 태어난 만큼 미국 시민이라고 맞섰다.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1898년 미국에서 태어나고 외국 외교관의 자녀처럼 예외적인 신분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국적과 관계없이 미국 시민권을 갖는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이후 출생시민권의 범위를 정한 핵심 판례가 됐다. 사실 출생시민권의 뿌리를 찾자면 이보다 앞선 남북전쟁 직후인 186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비준된 수정헌법 14조는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하고 그 관할권에 속하는 모든 사람은 미국과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라고 규정했다. 이 조항을 통해 노예제 폐지 뒤 해방된 흑인의 시민권이 보장된 것. 결국 출생시민권은 단순한 이민정책이 아니라, 노예제의 잔재를 끊고 미국이 누구를 국민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정한 헌법적 약속인 셈이다.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취임 첫날인 지난해 1월 20일 ‘미국 시민권의 의미와 가치를 보호한다’는 제목의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출생시민권 제한을 시도했다. 행정명령의 내용은 분명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당시 어머니가 불법 체류 중이거나 학생·취업·관광비자 등으로 임시 체류하고 있고, 아버지 역시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니라면 아이에게 시민권 증명 문서를 발급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는 시민권을 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대법원장, 시민권은 “권리를 가질 권리”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발표 직후 연방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제기됐다. 이후 대통령이 행정명령 하나로 누가 미국인이 될 수 있는지를 새롭게 정할 수 있느냐가 소송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미국의 정체성과도 맞닿은 이 소송에 국가적 관심이 쏠렸고, 트럼프 대통령 역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4월 대법원 구두변론 당시 직접 방청석에 앉아 변론까지 지켜봤다. 현직 대통령이 대법원 구두변론을 직접 방청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으로 돌아간 뒤 트루스소셜에 “미국은 출생시민권을 허용하는 유일하게 어리석은 나라”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캐나다와 멕시코를 포함한 여러 국가가 미국처럼 출생지를 기준으로 국적을 부여하고 있다.결국 지난달 대법원은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이 수정헌법 14조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것이다. 판결은 6 대 3이었다. 보수 성향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다수 의견을 작성했고, 진보 대법관 3명과 보수 대법관 2명이 합류했다. 대법원은 수정헌법 14조와 1898년 ‘미국 대 웡 킴 아크’ 판례를 근거로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원칙적으로 부모의 국적이나 체류 자격과 관계없이 시민권을 갖는다고 재확인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시민권을 ‘권리를 가질 권리’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판결 뒤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대법원의 판단을 “미국에 매우 나쁜 일”이라고 비판하며 의회가 출생시민권 폐지를 위한 입법에 즉각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대법원에 재심리를 요청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대법원이 구두변론과 본안 판결을 마친 사건에서 재심리 청원을 받아들여 결론을 다시 검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출생시민권은 수정헌법 14조에 명시된 권리인 만큼, 의회가 일반 법률로 이를 폐지하거나 크게 제한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는 출생시민권 자체보다 미국 입국 과정으로 전장을 옮기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대법원 판결 직후 미 법무부는 전국 연방검찰에 이른바 원정 출산 조직에 대한 수사를 우선하라는 지침을 내렸다.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 일각에서는 임신한 외국인의 입국 자체를 더욱 엄격하게 제한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출생한 아이의 시민권을 헌법 때문에 건드리기 어렵다면 출산 목적의 미국 입국부터 막겠다는 전략이다.
●“임신부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면 안 돼”
트럼프 행정부의 이 같은 접근에 대해 시민들의 반응은 갈린다. 퇴역 군인 마이클 헨더슨 씨는 “아이에게 책임을 묻자는 게 아니라 제도의 허점을 막자는 것”이라며 “관광비자로 출산만 하고 시민권을 얻는 일이 반복된다면 정부가 막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옹호했다. 반면 대학원생 앤절라 리 씨는 “임신한 사람을 모두 잠재적 범죄자처럼 보는 건 지나치다”며 “친척을 만나거나 여행하러 오는 사람도 많을 텐데,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공항에서 불편을 겪게 하는 건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사실 2020년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도 출산을 주된 목적으로 미국을 방문하려는 외국인에 대한 관광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규정 등을 도입하긴 했다. 이번 법무부 지침 역시 출산 행위 자체보단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사기와 허위 진술, 브로커 조직의 불법 행위를 겨냥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다만 원정 출산을 막겠다는 명분 아래 임신부에 대한 입국 제한을 광범위하게 확대하면 큰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당장 입국 심사관이 임신 여부와 출산 예정일, 실제 방문 목적을 어떻게 판단할지 그 기준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 여행이나 출장, 가족 방문을 위해 미국을 찾는 임신부까지 부당하게 입국을 제한받는 경우가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또 여성의 신체 상태를 입국 허가의 핵심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 자체가 차별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 문제를 끊임없이 부각하는 데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도 많다. 이민과 국경 통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정치 의제다. 그런 만큼 출생시민권 문제를 불법 이민과 원정 출산에 연결해 “미국 시민권의 가치와 국경을 지키겠다”는 메시지로 핵심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신진우 워싱턴 특파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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