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남들이 쓸모없다는 걸 추구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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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창가에 앉는 걸 좋아하면서도 기피했는데, 한 달에 한 번 자리를 바꿀 때 창가에 앉게 되면 45분 수업 정도는 창밖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금방 보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는 단 1초를 멈추는 법이 없었다. 매 프레임이 전례가 없는 나뭇가지를 충실히 바라보고 기록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1초 뒤에 반드시 바뀔 이미지에 유용성은 없겠지만, 유용성이 없는 것을 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괜찮은 세상이 아닐까. 최근 『노상관찰학 입문』을 읽으며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을 간만에 다시 떠올렸다.

『노상관찰학 입문』 / 사진. 필자 제공

『노상관찰학 입문』 / 사진. 필자 제공

문학평론가 김현은 문학이 무용하기에 억압하지 않고, 그래서 그 유용성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유용한 것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유용하다고 말한 바 있다. 억압을 떼어놓고 생각하더라도 그러하지 않을까. 유용한 것만 유용한 곳에서 유용들을 가속한다면 무용은 희소한 것이 된다. 희소한 것은 사용 가치를 지니니까. 무용을 반드시 유용하게 만들어야 하느냐고 누군가는 물을지 모르지만, 내겐 무용만을 드높이지 않다는 점이 좋다. 무용을 중시하면서도 결국 유용을 조금은 신경 쓰는 사람이라는 것. 한 조각의 유용이라고 할까, 유용의 굳은 어깨에서 힘을 풀고 한없이 하늘거리는 무용에게 약간의 사명감을 쥐여주기.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무용한 것을 추구하는 일련의 청년들이 있었다. 20세기 초 유행했던 고현학을 이어받아, 노상의 무용한 것들을 관찰한다는 '노상관찰학’을 추구한 것이다. 고현학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주요 모티브이기도 해서 익숙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당대의 도시를 수놓은 다채로운, 주로 상업과 산업에 관계된 요소들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산책자(플라뇌르)가 고현학을 수행하는 자라면 유용한 것에 대한 관심을 무용한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노상관찰자들의 주된 방법론이다.

아카세가와 : 현대미술을 외부에서 바라보니 뭔가 우스꽝스러웠고, 그런 예술이 도시 안에 수없이 존재한다고 느꼈죠. 가령 현대예술에서 화랑 안에 목재가 덜렁 놓여 있는 상황은 평범한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잖아요. 만약 화랑이라는 틀을 노상에 대입하면 그것도 현대예술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거죠. (…) 그런 예술권에서 탈출할 때 조금 힘들었습니다. 중력을 뿌리치고 나오는 셈이니까요. 그런데 그때는 우주 셔틀을 타고 나오는 제 안에 역시 꽤 자학적인 마음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예술을 해 왔으니까요.

노상관찰자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노상관찰학에 접어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대담이 특히 재밌다. 무용한 것에 대한 바람은 실은 너무나 유용의 인간이었던 이들의, 너무 유용하게 살다 보니 생긴 얼마간 비뚜른 자학 의식에서 온다. 유용한 것만 유용한 세상은 모든 것을 유용이라는 잣대로 평탄하게 만든다. 1분 1초를 사회가 권유하는 방향으로 쓰고, 현재와 미래를 협소한 몇 가지의 방향으로만 노정해야 한다. 그런 것이 아니꼬워서, 왜 내가 유용한 것만 해야 하지? 하는 마음에 무용한 것을 도모하는 시간이 온다. 무용은 비판의식에서 생겨난다.

아카세가와 : 당시 실제로 작업실을 외곽에 마련하고 추진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상하게 주방은 싼 곳에 빌리자는 둥의 발상으로 흘러갔죠.

미나미 : 가장 전형적인 예를 드는 게 좋겠어요. 오늘은 이쯤에서 일을 끝내고 목욕이라도 할까 하면서 옷을 벗고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전철을 타는 거죠(웃음).

아카세가와 : 욕실은 멀리 교외에 지어 놓았으니까.

마쓰다 : 거기서 이야기가 더 이상하게 흘러, 목욕탕까지는 복도를 통과해서 가고 싶은데 그 복도는 스기나미구에 있는 거죠. 목욕탕은 고토구에 있고(웃음).

아카세가와 : 스기나미구 복도를 지나 또 전철을 타고 고토구에 가야죠.

미나미 : 그때 가장 어처구니없던 발상이 2층에 올라가고 싶다는 것이었어요(웃음). 도시마구에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하는 거죠. 그때 했던 그 이야기들을 요쓰야 쇼헤이칸에 있던 계단을 발견하기 전에 했나 나중에 했나 아까 좀 생각해 봤어요.

후지모리 : 아, 순수 계단 말이군요. 토머슨 제1호.

그래서 무용한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대체로 다수가 웃을 때 저게 뭐가 웃기다는 거지 코웃음을 치고, 다수가 웃지 않을 때 즐거워하는 반골 기질을 지닌다. 남들이 결코 하지 않는 공상과 기획을 해나가는 사람들, 남들이 비난할수록 더욱 기세등등해지는,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들이다. 이들은 '도시 걷기용 소도구'를 가방에 챙겨 하루종일 걸으며 사진을 찍고, 매일 같은 장소에 들러 미세한 차이를 그림으로 그리며, 철거를 앞둔 무용한 건물을 매일같이 서성거리며 폐자재를 수집할 기록을 노리거나, 없어져도 다 없어지지는 않게끔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을 남긴다.

『노상관찰학 입문』 (220쪽) / 사진. 필자 제공

『노상관찰학 입문』 (220쪽) / 사진. 필자 제공

『노상관찰학 입문』 (290쪽) / 사진. 필자 제공

『노상관찰학 입문』 (290쪽) / 사진. 필자 제공

『노상관찰학 입문』 (320쪽) / 사진. 필자 제공

『노상관찰학 입문』 (320쪽) / 사진. 필자 제공

그들의 시작이 ‘비판’에 있기에, 그 무용의 기저에는 시대의식이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이고, 우리는 어떤 현대인인가 하는 자각이 배경이 된다. 일본의 고현학이 간토대지진 이후의 폐허에 생겨난 새로운 것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이들에게서 생겨났듯이, 노상관찰학은 그렇게 지어진 것들이 사라지는 시대에 생겨났다. 지금의 한국도 이미 많은 무용들이 유용으로 대체되었고, 앞으로 그 기세는 더욱 거세지기만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라지는 무용들이 우리의 삶에서 무용의 여유 또한 함께 짊어지고 사라진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누구도 초인이 아니기에, 주변을 돌보기 위해서도 여유는 반드시 필요하다. 유용함에서 비롯하는 사명감은 없으니까. 무용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는 새 흐름이 생겨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실천해야지, 하는 마음에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생각보다 '토머슨'(노상관찰자들이 거리의 무용한 것을 이르는 이름)은 찾기 어려웠다. 무용한 것을 위한 자리를 찾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구나, 생각하던 찰나 마주친 이것. 우편함처럼 생긴 공간에 환풍기 같은 것이 달려 있다. 도무지 용도가 짐작이 안 되어, 섣불리 ‘토머슨’이다! 외칠 수는 없었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이제 더 이상 효용은 없어 보였다. 이젠 단지 무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것에게 경배를 표하며 돌아섰다. 다음 '토머슨'을 찾기까지 일용할 한 줌의 위안을 얻은 것이다.

거리에서 마주친 '토머슨' / 사진. 필자 제공

거리에서 마주친 '토머슨' / 사진. 필자 제공

이재현 문학동네 국내문학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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