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미국 국적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을 쿠팡의 총수(동일인)로 지정했다. 공정위는 2021년 자산총액이 5조원을 넘은 쿠팡을 처음 공시대상기업집단에 편입하면서 법인인 쿠팡을 동일인으로 지정했는데, 5년 만에 이를 자연인인 김 의장으로 바꿨다.
공정위는 다음달 1일자로 쿠팡의 동일인을 쿠팡 법인에서 김 의장으로 변경한다고 29일 발표했다. 김 의장의 동생인 김유석 부사장이 국내 쿠팡 법인 경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판단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공정위는 2021년 공정거래법 시행령이 규정한 예외 요건을 충족했다고 판단해 김 의장이 아니라 쿠팡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핵심 요건은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자연인의 친족이 국내 계열회사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 않는 등 사익편취의 우려가 없을 때’이다. 하지만 올해 실시한 현장점검에서 김 의장의 친족인 김 부사장이 등기이사에 준하는 연봉을 받고, 물류·배송 등 주요 업무집행 방향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확인했다.
김 의장은 새로 동일인으로 지정돼 엄격한 사익편취 금지 규제를 받는다. 해외 계열사 지분 현황 등에 대한 공시 의무도 강화된다.
쿠팡은 공정위의 결정에 반발해 행정소송 절차를 밟기로 했다. 쿠팡은 입장문을 통해 “김 의장의 동생은 쿠팡 국내 법인의 임원이 아니며 계열사 지분도 갖고 있지 않다”며 “김 의장과 친족은 한국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지 않아 사익편취 우려가 없다”고 밝혔다.
공정위가 미국 국적의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면서 동일인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사익 편취와 경제력 집중을 막겠다는 당초 취지는 퇴색하고 기업인에 대한 압박 수단이 됐다는 지적이다. 홍대식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국인 투자자 관점에서 볼 때 동일인은 ‘한국은 아직도 족벌경영을 하는 나라’라고 인식하게 하는 제도”라고 꼬집었다.
공정위는 이날 자산총액 5조원이 넘는 102개 기업집단을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전년(92개) 대비 10개 늘었다. 공시대상기업집단의 소속 회사는 3301개에서 3538개로 237개 증가했다.
상조회사 웅진프리드라이프를 인수해 몸집을 키운 웅진과 ‘K뷰티’ 열풍을 타고 성장한 한국콜마 등이 대기업집단에 이름을 올렸다. 방위산업·조선업 등 주력 업종 호황을 누리는 한화는 처음으로 재계 서열 5위에 올랐다.
공정위 "김유석, 배송정책 결정한 실세"…쿠팡 "사익편취 우려 없어"
쿠팡 "행정소송으로 소명"…美의회 반발, 통상 마찰 우려
그동안 쿠팡의 ‘외국 국적 총수 지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 2라운드로 접어들 가능성이 커졌다. 공정거래위원회가 5년 만에 쿠팡의 동일인(총수)을 법인에서 김범석 쿠팡Inc 의장 개인으로 변경하고, 이에 반발하는 쿠팡이 ‘법적 대응’을 예고하면서다. ‘자연인’인 김 의장의 동일인 규제 대상에 포함돼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하며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던 쿠팡이 ‘한국식 대기업 규제’라는 새로운 시험대에 서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 의장 동생 경영 참여가 ‘트리거’
공정위가 29일 5년 만에 쿠팡 동일인을 ㈜쿠팡 법인에서 김 의장 개인으로 변경한 핵심 고리는 김 의장 동생인 김유석 쿠팡Inc 부사장의 경영 개입 여부다.
공정거래법 시행령 38조 4항은 자연인(개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 요건으로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자연인의 친족이 국내 계열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간 쿠팡은 ‘김 의장 친족이 지분을 보유하지 않았고, 공정거래법상 책임 있는 임원도 아니라’며 이 예외 요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했다. 공정위도 지난해까지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쿠팡의 동일인을 ㈜쿠팡 법인으로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 판단은 달랐다. 공정위는 대대적인 현장 검증 결과 김 부사장이 쿠팡 국내 사업의 핵심인 물류·배송 정책 관련 실질적 경영에 참여한 증거를 다수 파악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김 부사장이 물류·배송 관련 정기·수시 회의를 수백 회 이상 주최했고, 핵심 계열사인 쿠팡로지스틱스 대표를 불러 실적을 점검한 점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또 김 부사장의 회사 내 실질 직급이 계열사 대표이사와 비슷한 ‘최상위 등급’에 해당했고, 개인 비서를 두는 등 복지 및 보수 수준도 ‘등기 임원’에 준한다고 봤다.
5년 전과 판단이 달라진 것과 관련해 최장관 공정위 기업집단감시국장은 “지난해 쿠팡 개인정보 청문회 때 (쿠팡 동일인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고, 김 부사장 경영 참여에 대한 신고가 접수돼 면밀히 조사한 결과”라며 “쿠팡 내부 인원들도 김 부사장의 경영참여를 광범위하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쿠팡 “공시 추가 의무는 이중 규제”
쿠팡은 입장문을 통해 “향후 행정 소송을 통해 성실히 소명하겠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김 부사장이 실질적 경영에 참여한 게 아니므로 김 의장 개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쿠팡 측은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사인 쿠팡Inc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서 요구하는 각종 공시 의무를 이행 중이어서 동일인 지정에 따른 공시 의무 추가는 ‘이중 규제’라는 주장도 펴왔다. 이에 공정위는 “SEC 규제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것이고, 국내법상의 동일인 규제는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려는 다른 목적”이라고 반박했다.
최 국장은 한국GM, 에쓰오일 등 다른 외국 법인은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고, 쿠팡만 개인을 지정한 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최혜국대우 위반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GM과 에쓰오일 최대주주는 각각 사모펀드와 국부펀드”라며 “(쿠팡에 대한)정당한 법 집행에 대해 미국에서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더라도 계열사 공시 의무만 강화될 뿐 특별히 규제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쿠팡 측이 느낄 무게감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 많다. 재계 관계자는 “동일인의 친족에 부당한 혜택을 제공하는 걸 막는 사익편취 금지 규제는 법인이 아닌 자연인 동일인에만 적용된다”며 “법 위반 동일인 개인에 대한 직접 고발도 가능해진다”고 했다.
쿠팡의 지난해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공정위가 입장을 바꾼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김 부사장의 경영 참여 의혹이 집중 제기됐고, 범정부 쿠팡TF가 구성되면서 쿠팡에 대한 전방위 압박이 강화됐다. 이에 따라 ‘쿠팡플레이 끼워팔기’ ‘쿠팡이츠 최혜 대우 요구’ 등 다른 사건들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점쳐진다.
향후 한·미 통상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앞서 미 하원 ‘공화당 연구위원회(RSC)’ 소속 의원 54명은 “쿠팡 등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규제를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강경화 주미대사에게 전달한 바 있다.
박종관/김대훈/배태웅 기자 p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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