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잊게 만드는 독한 藥…술, 예술의 오브제가 되다

1 week ago 15

파머시(Pharmacy) 레스토랑 내부. /Pharmacy2 페이스북

파머시(Pharmacy) 레스토랑 내부. /Pharmacy2 페이스북

올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데이미언 허스트 특별전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전시가 최근 있었을까. ‘현대 미술의 이단아’라고 불리는 인물답게 몇 달간 전시장 안팎으로 뜨거운 관심과 논쟁이 이어졌다. 예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전시가 열리기 전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동시대적 신선함이 다소 퇴색한 작가에게 33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 그리고 공공 미술관의 상업성에 관한 비판이 주된 논쟁거리였다.

그럼에도 전시 자체의 예술적 성취와 관련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그가 제시한 ‘죽음’이라는 화두가 시대를 초월한다는 점을 확인시켰고, 작품의 제작 방식과 그 적절성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 자체가 활발한 사회적 담론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이 전시에 수많은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진 이유다. 그렇다면 시대의 아이콘인 그의 삶은 어땠을까. ‘악동’이라는 별명답게 그의 인생은 ‘술’을 떼어 놓고 논하기 힘들다.

시상식에서도 취해 버린 애주가

허스트는 젊은 시절 지독할 정도로 술을 탐닉했다. 1995년 영국 현대미술의 최고 영예인 터너상을 수상하는 역사적인 자리에서도 완전히 취해 수상 소감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받은 2만파운드의 상금조차 어디로 사라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당시 그는 술을 음미하는 수준의 애주가가 아니라 오로지 취하기 위해 술을 섞어 마시고 코카인까지 곁들이는 방탕한 중독자에 가까웠다.

다행히도 현재의 그는 술을 멀리하고 있다. 변화의 계기는 2002년 찾아왔다.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더 클래시의 조 스트러머, 예술가 마이클 주프와 밤샘 작업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 9시쯤 담배를 찾던 그의 시야에 일곱 갑의 빈 말버러 라이트가 들어왔다. 140개비 모두 자신이 피운 담배였다. 충격을 받은 그는 그길로 금연을 결심했고, 담배를 피우고 싶게 만드는 술까지 함께 끊어내며 방탕한 과거와 작별했다.

그는 예술과 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인물이기도 하다. 1998년 테이트 모던 전시 기간에는 자신의 미학을 투영한 ‘파머시(Pharmacy)’라는 레스토랑을 열었다. 아스피린 모양의 의자와 약장, 약국을 테마로 한 독특한 벽지가 특징이었다. 직원들은 프라다가 디자인한 수술복을 입고 볼타롤 지연제, 러시아산 퀄루드, 마취제 화합물 같은 파격적인 이름의 시그니처 칵테일을 서빙했다. 하우스 와인의 이름은 ‘pH’(수소이온농도지수)였다.

이듬해 파머시는 칼튼 런던 레스토랑 어워드에서 최고의 디자인 레스토랑 상을 받았지만, ‘약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영국 왕립 약학회와 갈등을 빚는다. 이 때문에 레스토랑 이름은 ‘아미 챕’을 거쳐 ‘파머시 레스토랑 앤드 바’로 두 차례 바뀌었고, 2003년까지만 운영됐다.

2016년 그는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를 열며 과거의 파머시를 재탄생시켰다. 이곳에선 정통 영국 요리와 함께 보드카 브랜드 블랙 카우(Black Cow)를 활용한 칵테일을 제공했다. 블랙 카우는 유청을 사용해 제조한 우유 보드카로, 1L를 만들기 위해 약 20L의 우유가 사용된다. 그는 ‘시즌 1’보다 점잖은 네이밍의 칵테일인 ‘블랙 카우 보드카 마티니’와 ‘도싯 동키’를 제공했다. 하지만 야심 찬 재도전 역시 2017년 막을 내렸다. 그 유명한 허스트에게도 냉혹한 요식업의 세계는 높은 벽이었던 모양이다.

예술을 술병 속에 담다

데이미언 허스트가 자신의 작품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앞에 앉아 있는 모습. /뉴스1

데이미언 허스트가 자신의 작품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앞에 앉아 있는 모습. /뉴스1

허스트는 상업 주류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협업)도 다수 진행했다. 앱솔루트는 공격적이고 감각적인 마케팅으로 성장한 스웨덴 보드카 브랜드로, ‘앱솔루트 아트 프로젝트’가 대표적 마케팅이다. 1986년 앤디 워홀을 시작으로 키스 해링, 에드 루샤, 루이즈 부르주아 등의 거장들이 참여해 앱솔루트의 시그니처 보틀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데이미언 허스트와 협업한 앱솔루트 보드카. /앱솔루트

데이미언 허스트와 협업한 앱솔루트 보드카. /앱솔루트

허스트는 1998년 자신의 대표작인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을 통해 이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포름알데히드를 가득 채운 유리 진열장 안에 뱀상어 사체를 넣은 작품으로, 앱솔루트와의 협업에서는 사체 대신 시그니처 보틀이 배치된 모습이 담겼다. ‘영원히 썩지 않게 보존한다’는 포름알데히드의 속성은 브랜드의 영속성을 증명하고 싶은 앱솔루트에 더할 나위 없는 헌사였다.

데이미언 허스트가 디자인한 벡스 맥주의 라벨. /Victoria and Albert Museum

데이미언 허스트가 디자인한 벡스 맥주의 라벨. /Victoria and Albert Museum

독일의 맥주 브랜드 벡스 역시 오랫동안 현대미술을 후원해온 조력자다. 이들은 1985년부터 주요 행사와 전시를 기념하기 위해 예술가들에게 한정판 라벨 제작을 의뢰했다. 허스트는 1995년 스폿 페인팅(Spot Painting)으로 그 여정에 참여했다. 스폿 페인팅은 동일한 크기의 다채로운 원들이 격자무늬로 배치된 작품이다. 작가의 고유한 손길 대신 기계적인 정확성을 선택한 이 작업은 앤디 워홀의 방식처럼 기술보다 개념을 판매하는 현대미술의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오죽하면 그는 “나를 위해 점을 그린 최고의 사람은 레이첼(조수의 이름)이었어. 그녀는 정말 훌륭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데이미언 허스트는 작품명에 약품 이름을 즐겨 붙였다. /Pharmacy2 페이스북

데이미언 허스트는 작품명에 약품 이름을 즐겨 붙였다. /Pharmacy2 페이스북

이 시리즈의 정식 명칭은 ‘제약 회화(Pharmaceutical Paintings)’다. 그가 작품마다 LSD, 비소, 모르핀 같은 화합물 및 약품명을 붙인 이유는 현대인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한 과학과 의학에 의지해 죽음을 유예하려고 한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질서 정연하게 배치된 알약 같은 점들은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현대 의학의 차가운 시스템을 상징한다. 벡스의 이 한정판 보틀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현재는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V&A)에도 소장돼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허스트는 예술을 캔버스 밖으로 꺼내 술병에 담았고, 레스토랑으로도 만들어 우리 삶의 영역에 의도적으로 침투해 왔다. 이달 말까지 열리는 특별전은 그가 걸어온 입체적인 예술적 행보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다. 그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아마도 전시장을 찾은 관람자의 몫으로 남겠지만 말이다.

정인성 책바 대표(wave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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