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인간이 시를 사랑한다기보다 시가 인간을 사랑한다는 믿음이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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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정호승 시인 (새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 출간 관련) 인터뷰 |
정호승(75) 시인이 3년 만에 내놓은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에 실린 ‘시인의 말’을 읽다 눈길이 갔던 문장이다. 최근 서울 중구 KG타워에서 만난 그에게 이 문장의 의미를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50여 년 동안 1000편 이상의 시를 썼어요. ‘쓰지 않아도 될 시를 너무 많이 썼다’는 생각에 시에 대한 마음의 안테나를 잠시 차단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의 전파가 저에게 계속 다가오는 거예요. 고갈된 줄 알았던 시의 샘도 다시 채워졌고요.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시가 인간을 사랑한다는 걸.(웃음)”
한국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시인
정 시인은 그동안 한국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시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수선화에게’를 비롯해 ‘슬픔이 기쁨에게’, ‘우리가 어느 별에서’ 등 그의 시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편의점에서 잠깐’은 정 시인이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6월까지 쓴 시 125편을 수록한 시집이다. 이 중 100편은 다른 곳에서 발표한 적 없는 미공개 시다.
표제작 ‘편의점에서 잠깐’은 현대적인 느낌의 제목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시의 내용은 제목의 감성과 다르다. 이 시의 주인공은 늦은 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우연히 재회한 헤어진 연인이다. 정 시인은 “할인가로 사랑을 살 수 있다 해도 /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없는 불량품”이라며 이미 끝나버린 사랑의 쓸쓸함을 노래한다.
정 시인은 “이별도 사랑도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전하고 싶은 시”라며 “우리는 이별을 하면 그전까지의 사랑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사랑도 이별도 그 가치는 모두 동일하다”고 말했다. 이어 “상품을 사고파는 행위가 이뤄지는 편의점에서 사랑과 이별의 이익과 손실을 따져본다면 모두 다 순이익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부연했다.
이번 시집에는 이별 외에도 패배, 추락, 쓰레기 등 부정적인 단어를 긍정의 의미로 끌어안는 시들이 여러 편 수록돼 있다. 정 시인은 “나는 패배가 고맙다 /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패배에 대하여)라거나 “재가 되어 흙이 되고 거름이 되는 / 쓰레기가 될 수 있다면 / 나는 살아생전 쓰레기가 되어도 좋다”(쓰레기)고 노래한다.
노년의 나이에도 세상을 지혜롭게 바라보는 삶의 태도가 엿보이는 시다. 정 시인은 “젊었을 때는 승리, 성공, 이익 등을 추구하지만, 노년이 되니 패배, 실패, 손실을 통해 삶이 이뤄진다는 걸 알게 된다”며 “어리석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삶,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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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새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 표지. (사진=창비) |
“젊은 세대 감각 수용 노력”
그의 시에선 70대 중반의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쉬운 우리말로 자연과 일상을 노래하는 그의 시는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어 읽는 이의 마음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는 노년에도 시대의 감각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시를 쓰고자 하는 정 시인의 부단한 노력과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독자들에게 노년의 푸념을 늘어놓는다면 잔소리일 뿐”이라며 “나는 김소월, 한용운 등 전통적 서정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지만, 젊은 세대의 감각도 수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정 시인과 비슷한 시기 등단한 김승희 시인은 이번 시집 추천사에서 그를 두고 “오래된 시인이자 새로운 시인”이라고 평했다. 정 시인은 “내게 큰 약(藥)이 되는 추천사였다”며 “김 시인의 말처럼 나는 늙은 시인이지만 그럼에도 시를 쓸 때만큼은 새로운 시인이라는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시집’이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 시를 읽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정 시인은 “인터넷에서 챗GPT가 내가 쓴 시라고 추천해준 시를 올린 글을 본 적 있는데 모두 다 엉터리였다. 블로그에 올라온 시도 90% 이상은 원문과 달랐다”며 “시는 시집을 통해 읽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지금 시대에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선 “시는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며 “인간을,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 시를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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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새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을 펴낸 정호승 시인이 최근 서울 중구 KG타워에서 가진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영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