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그림은 "볼 것도 없다"던 추사 김정희 전시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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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2부 ‘1849년, 추사의 그림 수업‘에 나온 김정희의 '예림갑을록'과 여덟 제자가 그린 '팔인수묵산수도'.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전시 2부 ‘1849년, 추사의 그림 수업‘에 나온 김정희의 '예림갑을록'과 여덟 제자가 그린 '팔인수묵산수도'.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1848년(헌종 14년) 제주도에 귀양 갔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돌아왔다. 8년간의 유배는 고됐지만, 예술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한층 깊어졌다. 형사(形似·보이는 대로 재현함) 대신 사의(寫意·사물을 빌어 뜻을 나타냄)를 추구했던 추사의 철학이 완성됐기 때문이다. 엄동에도 푸르름을 지키는 소나무를 그린 국보 ‘세한도’가 이때 그려졌다.

한양으로 돌아온 이듬해 제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서화에 통달한 스승을 모시고 품평회를 열었다. 추사는 제자 14명의 작품을 감평했고, 이를 ‘예림갑을록’으로 기록했다. 추사 예술론의 정수가 담긴 ‘특급 피드백’인 셈. 이 평론은 그의 회화관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다.

‘세한도’부터 보물 ‘난맹첩’, ‘불이선란도’ 등 추사의 대표작과 ‘예림갑을록’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작품까지 조선 말 문인화를 대표하는 추사 화파의 맥을 짚을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오는 7일 개최하는 대구 수성구 대구간송미술관의 기획전 ‘추사의 그림 수업’이다. 지난해 호암미술관의 ‘겸재 정선’ 특별전 등으로 높아진 서화 등 고미술에 대한 관심을 잇는 전시로 주목받는다.

대구간송미술관 ‘추사의 그림 수업’ 전시에 나온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15m 두루마리 대작으로 추사의 그림에 여러 문인들의 글이 붙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대구간송미술관 ‘추사의 그림 수업’ 전시에 나온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15m 두루마리 대작으로 추사의 그림에 여러 문인들의 글이 붙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당대 문화 아이콘의 위상

총 4부로 구성된 전시에는 47건 67점의 작품이 소개된다. 전시를 여는 1부 ‘추사, 시대를 열다’만으로도 관람객의 발걸음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추사의 대표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간 추사 관련 전시가 고증학 관점이나 서예 중심으로 다뤄진 경우가 많았던 것과 달리, 그림을 통해 그의 철학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애호가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하다.

조선 선비들은 글씨(학문)와 그림(예술)이 하나라고 여겼다. ‘서화동원’(書畵同源) 내지는 ‘서화일치(書畵一致)’ 예술관으로, 이런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준 인물이 추사다. 미술관 측은 “추사는 학문과 예술이 하나로 녹아든 경지에서 예술을 바라봤고,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1부에는 추사체를 대표하는 ‘계산무진’과 함께 자기 내면을 투영한 ‘고사소요’, ‘불이선란도’ 등 글씨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글씨들이 걸렸다.

전시 1부 ‘추사 秋史, 시대를 열다’에서 선보이는 보물 '김정희 초상'. 제자 이한철이 1857년 그린 작품이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전시 1부 ‘추사 秋史, 시대를 열다’에서 선보이는 보물 '김정희 초상'. 제자 이한철이 1857년 그린 작품이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가장 눈여겨볼 작품은 역시 추사가 유배 시기에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다. 이상적은 이 작품을 연경(북경)으로 가져가 청나라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문인들에게 선보였고, 하나같이 감탄한 이들은 앞다퉈 추사에 대한 존경의 글을 ‘세한도’의 발문에 남겼다. 추사가 조선을 넘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의 위상을 보여준 작품인 셈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수집가로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 고 손창근씨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해 세상에 나온 이 작품이 영남 지역에서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세한도’는 5월 10일까지만 공개한 후 추사 묵란의 정점을 보여주는 ‘난맹첩’으로 교체된다.

추사화파 맥 짚어보기

전시 2부 ‘1849년, 추사의 그림 수업’은 제자들의 그림으로 스승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2부는 ‘예림갑을록’에 담긴 추사의 꼼꼼한 비평을 통해 관람객을 당시의 그림 수업 현장으로 안내한다. 추사는 김수철의 ‘계당납상’을 두고 ‘마음에 든다면서도 홍염(먹 번짐)이 과하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허련의 ‘추강만촉’에 대해선 ‘풍치가 있고 필의에 메마르거나 껄끄러움이 없다’며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허련 등이 그린 '팔인수묵산수도'. '예림갑을록'에서 추사의 비평을 받은 24점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이다. ⓒ리움미술관

허련 등이 그린 '팔인수묵산수도'. '예림갑을록'에서 추사의 비평을 받은 24점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이다. ⓒ리움미술관

품평회에 나온 24점의 작품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전해지는 ‘팔인수묵산수도’도 함께 볼 수 있다. 이어지는 3부 ‘예림(藝林)의 여덟 제자’가 이 작품을 함께 그린 이한철, 전기, 유숙, 박인석, 유재소 등 여덟 제자의 작품이 걸리는 만큼, 2~3부를 통해 추사의 가르침을 어렴풋하게 느껴볼 수 있다.

4부 ‘추사의 향기 매화에 깃들다’는 추사 화파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조희룡의 ‘홍백매도’를 비롯해 유숙, 김수철 등의 매화 작품으로 추사 화파의 변화와 성취를 확인하는 자리다.

추사의 문인화에 대한 이상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지향에 따라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유배 중인 추사를 찾아간 제자 허련이 제주의 풍광을 보고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린 지두화 ‘제주 망경루’ 등 7점의 미공개작이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된다.

허련의 화첩 '소치화품' 에 실린 지두화 '제주 망경루', ⓒ공창호 소장.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허련의 화첩 '소치화품' 에 실린 지두화 '제주 망경루', ⓒ공창호 소장.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앞서 ‘겸재 정선’ 전시를 다녀왔거나, 지난 2월 재개관해 정선의 ‘박연폭포’를 선보인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을 다녀온 관람객이라면 특히 찾아가 볼 만한 전시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정선 함께 조선 후기 문화의 격을 높인 추사지만, 앞선 세대인 정선의 그림을 두고 “볼 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각을 세웠단 점에서다.

사유와 이상을 중시한 남종문인화를 높게 친 만큼, 높은 회화적 묘사성을 갖춘 그림을 속되게 봤기 때문이다. 물론 두 거장에 사상에 대한 평가는 관람객의 몫이다.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학문과 예술의 거인 김정희와 제자들의 작품을 소개하게 돼 뜻깊다”며 “추사화파 작품을 통해 한국 문화의 정체성과 아름다움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했다. 관람료는 성인 1만1000원, 학생·청소년 5500원. 전시는 7월 5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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