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에 접어든 여자아이. 점점 변하기 시작한 자기 몸을 구석구석 살피던 중 겨드랑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그의 겨드랑이에는 털이 아닌 풀이 듬성듬성 나기 시작했다.
2025년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 감독상을 받은 영화 <불쑥>의 시나리오다. 작품은 엄마를 여읜 어린 여자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불쑥>을 만든 김해진 감독을 12일 서울 중구 쌍림동 CJ제일제당 본사에서 만났다. 1999년생의 젊은 영화감독인 그가 학창 시절 느꼈던 두려움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어요. 지금은 다행히 완치됐지만, 그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마음 속에 자리 잡았어요. 지금도 엄마가 슬로우모션으로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악몽을 꿀 때가 있어요"
작품의 배경이 된 시골집도 실제 김 감독이 어린 시절 종종 놀러 갔던 할머니 집이다. 인구 800명도 되지 않는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에 위치한 이 집은 풀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김 감독은 고요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과 두려움을 전하고자 했다. 그가 사용한 도구는 대사가 아닌 이미지와 분위기였다. 김해진 감독은 "한 편의 시처럼 반복되는 이미지를 만들길 원했다"며 "주제를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작품을 아우르는 분위기로 감정을 전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주인공의 이모가 임신해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동그랗게 부푼 배, 무덤에 난 잔디처럼 겨드랑이에 나는 풀을 통해 무덤과 죽음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자글자글한 입자가 보이고 초록빛이 도는 화면이 마치 필름 사진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분위기를 전한다.
<불쑥> 제작 과정에 영화 '우리들'을 만든 윤가은 감독과 '연애 빠진 로맨스'를 쓴 정가영 감독이 멘토로 참여했다. CJ문화재단 신인 단편영화감독 지원사업 '스토리업'에 선정돼 시나리오 개발, 멘토링, 영화제 출품 등 영화 제작 과정을 지원받으면서다. 김 감독은 "선배 감독들의 멘토링을 받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내면을 드러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며 "영화를 생각하는 진심, 그리고 그 진심을 영상을 통해 전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첫 장편영화를 만들 준비도 하고 있다. 2017년 울산 대지진 당시 수능을 치렀던 그의 경험이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김해진 감독은 "당시 지진이 수험생들의 분열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며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들 사이 균열을 지진과 엮은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김 감독에게 어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관객을 울리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대답했다.
"'애프터썬'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관객 누구나 보고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담아 마음을 움직이는 감독이 될 겁니다"
구교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