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빛을 머금은 대리석 바닥이 고요한 수면처럼 반짝이고, 중세 유럽 건축물을 형상화한 테라스 유리 벽에 온기를 품은 햇살이 흐른다. ‘럭셔리 주택’은 단순한 거주의 개념을 넘어 인간이 꿈꾸는 세계를 담아낸 캔버스와 같다. 화려한 외관이나 값비싼 소재는 본질이 아니다. 공간을 통해 빚는 이야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연결돼 있다.
한국의 전통 한옥이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며 시간 속에서 깊어지는 멋을 간직하듯, 현대의 럭셔리 주택도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건축가만의 철학을 품고 있다. 세계적 건축 거장인 스페인의 라파엘 모네오가 설계한 ‘에테르노 청담’(서울 청담동)은 구조적 리듬감과 현대적 미니멀리즘을 결합해 공간의 여백을 담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에테르노는 스페인어로 ‘영원’이라는 뜻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치와 희소성을 지닌다는 의미를 담았다.
집이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는 휴식과 안락을 위한 공간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꿈이며 시대를 초월한 유산이다. 서울 성북동에는 오랜 세월을 간직한 고택이 줄지어 있고, 남산이 내려다보이는 한남동 언덕 위에는 현대적 감각을 더한 저택이 우뚝 솟아 있다. 단순히 화려함만 뽐내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섬세한 미학이 깃들어 있다. 고급 가구·조명 등이 조화를 이룬 거실과 주방, 문을 열면 마주하는 정원과 예술 조형물…. 모든 것이 하나의 풍경이 돼 살아 숨 쉰다.
세계로 시선을 돌리면 고급 주택은 더욱 다채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건축계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여성 최초로 받은 이라크 출신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 바르비하에 있는 럭셔리 주택 ‘캐피털 힐 레지던스’를 통해 우주선과 같은 미래 디자인을 선보이면서도 자연과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가에 자리한 ‘빌라 라 레오폴다’는 지중해와 태양을 품고 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초고층 펜트하우스에서는 도시 불빛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집은 단순히 ‘사는(buying) 게 아니라 사는(living) 곳’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건축가들은 작품을 창조해 낸다. 벽에 스며든 기억, 창을 통해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 계절마다 변화하는 풍경 속에서 삶을 발견한다. 한 채의 집이 단순한 공간을 넘어 ‘살아 있는 예술’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 공간을 탐험하며 숨겨진 이야기를 들여다보려 한다.
거실을 슈퍼카 전시장으로…0.1%는 안식처부터 다르다
한국 고급주택 '스펙' 보니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남산 중턱의 한 붉은 벽돌 건물로 슈퍼카 한 대가 들어간다. 107대를 주차할 수 있는 넓은 지하 주차장이지만 차는 곧바로 ‘자동차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차에서 내리자 주거 공간이 나타나고, 슈퍼카는 집에 전시해 놓은 작품처럼 유리 엘리베이터 안에 주차해 놓는다.
지난해 입주한 서울 이태원동의 고급 빌라 ‘어퍼하우스 남산’에 적용된 첨단 주차 시스템 ‘스카이 개라지(sky garage)’의 모습이다. 총 19가구의 입주자는 면면이 화려하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의 장녀 서민정 씨, 신성재 삼우 부회장, 한상원 한앤컴퍼니 대표, 배우 하정우, 가수 싸이 등이 분양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뉴욕 맨해튼, 중동 두바이 등에서나 볼 수 있던 상위 0.1%를 위한 럭셔리 하우스가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서울 청담동 ‘에테르노 청담’(29가구), ‘PH129’(29가구)를 비롯해 한남동 ‘파르크 한남’(17가구), 서빙고동 ‘아페르 한강’(26가구) 등이다. 이들 주택은 분양가 상한제를 피하기 위해 30가구 미만으로 설계하고 5성급 호텔 서비스를 결합한 게 특징이다.
지난해 입주한 에테르노 청담은 고급 주택 시장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건축계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의 독창적 설계, 한강이 바로 앞에 보이는 뛰어난 입지, 단 29가구라는 희소성을 앞세워 2021년 3.3㎡당 2억원에 달하는 가격에 분양을 성공시켰다. 가수 아이유가 가장 작은 전용면적 244㎡를 130억원에 분양받아 화제가 됐다.
건물 높이는 91m에 이른다. 35층짜리 청담자이 아파트 높이(104m)와 맞먹는다. 실내 층고가 4m, 복층은 7m에 달한다. 영화감상실, 운동시설, 피부관리실, 스크린골프장 등 커뮤니티 시설과 함께 호텔처럼 24시간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집 청소와 세탁, 반려동물 돌봄, 세차와 정비 등도 대행해준다. 고급주택 분양 마케팅 업체인 태복플래닝 관계자는 “주요 수요자는 30~60대로 해외와 호텔 생활이 익숙하다 보니 관리가 힘든 단독주택보다는 호텔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급 빌라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아페르 한강은 유현준 건축가가 설계하고 거주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형 유리창으로 개방성이 강한 한옥 느낌이 들도록 현대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을 구현했다. 모든 가구에 넓은 테라스를 설치한 것도 특징이다. 세탁, 세차 등 컨시어지 서비스에 더해 운전기사가 딸린 리무진 예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차별화 포인트다.
PH129는 전 가구가 층고 6.6m 복층 구조로 뛰어난 개방감이 돋보인다. 파르크 한남은 유엔빌리지 안에 있어 한강이 바로 앞에 보이는 게 장점이다. 서울 성수동 ‘갤러리아 포레’(230가구)’와 ‘아크로 서울 포레스트’(280가구), 한남동 ‘한남더힐’(600가구)과 ‘나인원 한남’(344가구) 등도 자산가에게 인기 있는 고급주택이다. 고급주택 컨설팅·중개 회사 앨리어스의 이경미 대표는 “나이가 지긋한 전통 부자도 강남을 잘 안 가려고 하고 한남동이 마지노선”이라고 설명했다.
공사 중인 고급주택도 많다. 청담동 ‘에테르노 압구정’(29가구), 삼성동 ‘라브르27’(27가구)과 ‘세레노 삼성’(14가구), 서빙고동 ‘아페르 파크’(24가구) 등이 대표적이다. 에테르노 압구정은 축구선수 손흥민이 400억원에 펜트하우스를 분양받아 유명해졌다. 2개 동으로 구성된 라브르27은 2층 단독주택을 옆으로 붙인 듯한 가든하우스 5가구가 눈길을 끈다. 가구마다 1층에는 개별 정원이, 루프톱에는 수영장이 제공된다.
80년대엔 청담동 주택, 2000년대엔 주상복합…요즘은 럭셔리 빌라
시대별 '고급주택 트렌드'
서울 성북동 단독주택, 청담동 빌라, 도곡동 초고층 아파트…. 부자가 선호하는 고급주택은 시대에 따라 지역과 유형이 변해왔다.
전통 부촌인 성북·평창·한남동은 1960~1970년대 급속한 경제 성장기에 정·재계 인사들이 집을 지으면서 형성됐다. 마당이 넓고 지하실을 갖춘 지상 2층 규모 단독주택이 주를 이뤘다. 성북동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살던 곳으로 유명하다. 한남동은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배산임수’ 지형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198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하자 청담·서초·방배동에 빌라 형태의 고급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강북 산동네 단독주택은 조용하고 사생활이 보장됐지만 관리가 어려웠다. 교통도 불편했다. 새로운 부자들은 청담동 빌라를 택했다. 효성빌라, 삼익빌라 등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들어선 도곡동 타워팰리스, 목동 하이페리온 등 초고층 주상복합이 주목받았다. 그야말로 ‘부의 상징’처럼 보였다. 보안이 철저했고 63빌딩보다 높은 곳에서 서울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2010년대 준공한 한남동 ‘한남더힐’과 ‘나인원 한남’은 아파트로 분류되지만 고급 리조트 같은 분위기로 인기를 끌었다. 나인원 한남은 보안 요원이 단지를 지키며 폐쇄성을 강화했다. 고급스러운 외관에 호텔식 커뮤니티 시설과 편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2020년대엔 어퍼하우스 남산 같은 30가구 미만 고급 빌라가 대세로 떠올랐다. 단독주택 수준의 사생활 보호에 호텔급 시설을 갖춰 연예인과 기업 회장이 많이 찾는다.
앞으로는 복합개발 단지로 유행이 옮겨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쇼핑몰, 호텔, 종합병원, 국제학교, 미술관, 오피스에 1400가구의 거주 공간을 갖춘 일본 도쿄 ‘아자부다이 힐스’ 같은 모델이다. 일반적인 부자는 과한 사생활 보호보다 다양하고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생활 인프라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공사가 진행 중인 이태원동 ‘더 파크사이드 서울’(옛 유엔사 부지), 설계 단계인 회현동 힐튼호텔 부지 개발 사업 등이 후보지로 꼽힌다.
House Of Art
예술 작품이 된집
“아침에 일어나면 푸른 하늘만 보고 싶어요.”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간결했지만 다소 난해했다. 이웃과 마주하지 않고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드림 하우스’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대화 상대는 여성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받은 이라크 출신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 그는 “(집이) 나무 위에 있어야 한다는 거 알고 있죠?”라고 물으며 금세 냅킨에 스케치를 그려냈다.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 바르비하 지역에 있는 럭셔리 주택 ‘캐피털 힐 레지던스’(2018년 완공)는 이렇게 탄생했다. 사선과 비정형성 등 해체주의적 요소를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공상과학(SF) 영화에 나올 법한 우주선 모양의 4층 높이 건물이 우거진 숲 사이에 들어섰다. 메인 침실과 외부 테라스 등이 있는 최상층부의 ‘머리’ 공간은 땅에서 22m 높이에 떠 있다. 20m까지 자라는 커다란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거실과 식당, 주방 등이 있는 ‘몸통’ 공간은 경사진 삼림 지형과 어우러지도록 설계됐다. 몸통과 머리를 세 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연결하는 구조다. 하디드는 수평과 수직 중심의 구조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다. 물결처럼 흐르는 느낌의 곡선을 활용하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유동적인 형태를 추구했다. 미래 지향적 디자인을 선보이면서도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것이다.
캐피털 힐 레지던스는 하디드가 생전 설계한 유일한 개인 주택으로 유명하다. 러시아 부동산 개발업자 블라디슬라프 도로닌이 집주인이다. ‘누군가의 집’을 넘어 건축가의 혼과 철학이 집약된 예술 작품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건축 거장의 작품이라고 하면 대개 박물관, 미술관, 사옥, 고층 빌딩 등 랜드마크 건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예술성과 기능성, 프라이버시 등을 동시에 살린 주택 작품도 적지 않다.
일본의 대표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선보인 ‘152 엘리자베스’(2019년 준공)는 화려함과 고즈넉함을 모두 느낄 수 있는 도심 속 고급 공동주택이다. 7가구로 구성된 7층짜리 건물이다. 값비싼 대리석이나 화강석 마감 대신 콘크리트와 철, 유리 등 ‘20세기 재료’를 사용해 외관을 꾸몄다. 안도의 시그니처인 ‘노출 콘크리트’ 기법을 적용했고, 전면 대부분을 유리로 마감했다.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개방감이 묻어난다.
“집은 자기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는 안도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겼다. 빛, 공기, 소리, 물 네 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룬 디테일이 눈에 띈다. 건물에 들어서면 빛과 그림자 사이 균형을 마주할 수 있고, 내부 유리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온다. 창문과 벽 외관은 외부 소음을 제거하고, 공용과 개인 공간의 나무 패널은 편안함을 더한다. 펜트하우스와 테라스 등에선 뉴욕의 야경도 누릴 수 있다. 맨해튼을 포용하면서도 맨해튼과 분리된 공간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건축가가 자신이 살 집을 직접 설계한 사례도 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스페인 북부 어촌마을에서 지은 별장 ‘코루베도 하우스’(2002년 준공)가 대표적이다. 국내에선 서울 한강로 아모레퍼시픽 본사 설계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간결함, 지속 가능성, 주변 환경과의 조화 등을 강조하는 그의 철학이 코루베도 하우스에 오롯이 반영됐다.
이 주택은 전체적인 통합을 꾀하는 동시에 디테일에서 특별함과 차별성을 더했다. 주변 집들은 바다 반대편의 마을 쪽으로 정문을 냈다. 발코니가 마을 방향에 설치됐으며 바닷가 쪽엔 대부분 작은 창문을 마련했다. 그러나 치퍼필드는 바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층엔 해변으로 이어지는 경사로를 뒀고, 2층에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파노라마 형태의 긴 유리 창문을 배치했다. 이를 통해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동시에 탁 트인 바다를 감상하며 독서와 요리, 식사 등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유명 건축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주택은 국내에도 여럿 있다. 이 중 야마모토 리켄이 경기 성남시에 선보인 100가구 규모 ‘판교하우징’(월든힐스 2단지·2010년 준공)이 유명하다. 판교하우징은 2층 출입 공간을 통유리로 만드는 파격을 보여줬다. ‘1가구 1주택’으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의 폐쇄적 주거 패러다임을 벗어나기 위해서다. 초기에는 사생활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3년 만에 미분양을 모두 털어냈다. 현재는 통유리 공간이 주민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소로 호평받고 있다.
하늘을 탐하는 뉴욕…하이드 파크 녹음을 탐하는 영국
해외 슈퍼리치들의 주택은
해외 ‘슈퍼 리치’는 어떤 집에 살까.
미국은 지역과 직업 등에 따라 주거 선호도가 다르다. 미국 부동산 플랫폼 네오집스의 어태수 대표는 “뉴욕엔 한국의 ‘시그니엘 레지던스’ 같은 고층 펜트하우스가 많고, 캘리포니아는 말리부, 벨에어처럼 바다가 보이는 대저택이 유명하다”고 말했다. 기업 경영자를 비롯해 비즈니스맨은 호텔식 컨시어지 서비스가 제공되고 네트워킹 활동을 하기 좋은 도심의 펜트하우스를 선호한다. 엔터테인먼트업계 거물 등은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는 해변의 개인주택을 좋아한다는 설명이다.
로스앤젤레스(LA) 대표 부촌인 벨에어에 조성된 ‘더원(The One)’이 대표적 호화 주택이다. 몸값만 2억9500만달러(약 434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침실 21개와 욕실 42개, 50대 규모 주차장, 볼링장, 나이트클럽 등이 마련돼 있다. 바다와 LA 시내를 볼 수 있는 360도 조망을 갖췄다.
뉴욕 맨해튼에선 ‘220 센트럴 파크 사우스’가 유명하다. 켄 그리핀 시타델 최고경영자(CEO)가 2019년 2억3800만달러를 주고 매입한 펜트하우스가 있는 곳이다. 총 79층 건물 중 꼭대기 4개 층에 걸쳐 펜트하우스가 조성돼 있다. 센트럴파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유럽에서는 영국 런던의 ‘원 하이드 파크’가 관심을 끈다. 4개 동, 86가구로 구성돼 있다. 펜트하우스는 복층 구조여서 개방감이 뛰어나고, 테라스에서 하이드 파크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유리창이 방탄으로 돼 있고, 특수부대 출신 요원이 경비를 맡는 등 보안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프랑스의 ‘빌라 라 레오폴다’는 궁전에 가깝다. 벨기에 국왕이던 레오폴드 2세가 지었으며, 지중해를 감상할 수 있는 저택이다. 대지면적이 7만㎡를 넘고, 수영장만 12개에 달한다.
안정락/임근호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