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차 IPA 아태학회 서울서 성료
나르시시즘을 관계 단절로 재정의
해법은 사랑 회복하는 정서적 재건
이창동 감독 ‘밀양’ 세미나도 화제
예술로 읽어낸 인간의 고통과 애도
현대 사회에서 ‘나르시시스트’는 기피 대상 1순위로 꼽힌다.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이기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 정신분석가들은 그 화려한 자기중심성 이면에 깊은 상실과 결핍, 그리고 치유를 향한 간절한 열망이 숨어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국제정신분석협회(IPA)와 대한정신분석학회(KPC)가 공동 주최한 제5차 IPA 아시아-태평양 학회가 지난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사흘간 서울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개최됐다. ‘자기애의 재해석: 상실에서 사랑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학회에는 전 세계 400여명의 정신분석가와 전문가들이 집결해 현대인의 심리적 고통과 회복의 길을 모색했다.
이번 학회는 나르시시즘을 단순한 성격 장애가 아닌 관계의 단절로 인한 결과물로 재정의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발표자들은 현대인이 겪는 과도한 자기 집착이 사실은 성장 과정에서 적절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한 자기애적 손상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타인과 깊이 연결되지 못할 때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데 이것이 외부로는 오만함이나 과시, 혹은 타인에 대한 냉담함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학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결국 해법은 자신에게만 고정된 시선을 타인과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정서적 재건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가장 눈길을 끈 세션은 이창동 감독이 참여한 특별 세미나였다. 영화 <밀양>을 매개로 인간의 극한적 고통과 상실, 그리고 용서의 본질을 다룬 이 자리에는 해외 분석가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 감독은 창작자로서 인간의 고뇌를 마주하는 진솔한 태도를 공유했고 참석자들은 영화 속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붕괴와 회복의 과정을 통해 국적과 문화를 초월한 인간 보편의 슬픔에 깊이 몰입했다. 이는 정신분석이 박제된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매개로 인간의 무의식과 살아있는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됐다.
학회는 한국 사회 특유의 집단 트라우마가 개인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도 심도있게 다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급격한 산업화로 이어진 격동의 역사가 한국인의 무의식에 남긴 흔적을 분석한 것이다.
특히 ‘세대 간 전이’ 개념이 비중 있게 논의됐다. 부모 세대가 겪은 전쟁의 공포나 생존 불안이 적절히 해소되지 않을 경우 이는 자녀 세대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나 과도한 경쟁심, 수치심 등의 형태로 대물림된다는 지적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극심한 갈등과 청년 세대의 심리적 고통을 이해하는 중요한 학문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디지털 전환기 속 정서적 고립에 대한 경고도 이어졌다. 초연결 사회에서 기술적 연결은 강화됐으나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정서적 교류는 오히려 고립되고 파편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학회 관계자들은 “인공지능(AI)이 지능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의 영역은 오직 인간만의 것”이라며 “기술에 소외된 인간의 정서와 관계 형성 능력을 복원하는 것이 향후 정신분석학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학회는 한국 정신분석학계의 비약적인 성장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지난해 대한정신분석학회가 IPA 구성학회(Component Society)로 승인된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국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기 때문이다. 1983년 한국 분석가가 독일 학회에 ‘참관인’ 수준으로 참석했던 것과 비교하면 40여년 만의 괄목할 만한 변화다.
정선주 대한정신분석학회장은 “이번 학회는 한국 정신분석의 임상적·문화적 역량을 전 세계에 알린 이정표가 됐다”며 “앞으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바탕으로 국제 정신분석 공동체와 깊이 있게 교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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