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기 잡으려다 흑염소잡겠네…"사료값도 못 건져" 농가에 무슨 일이 [이광식의 한입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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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농림축산식품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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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지역에서 20년 가까이 흑염소 농장을 운영해온 이모 씨. 흑염소 고기 가공부터 진액을 추출·판매하는 일까지 흑염소로 안 해본 장사가 없는 그는 업계에서 ‘베테랑’으로 통한다. 그런 그가 요즘 들어선 농장의 흑염소 숫자를 차츰 줄이고 있다. 이 씨의 축사에선 흑염소를 3000두까지도 너끈히 키울 수 있지만, 지금은 700두 안팎만 기르고 있다. 그는 “수입산이 너무 많이 밀고 들어온다”며 “흑염소 가격이 너무 내려 도무지 많이 키울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흑염소 시세, 당 1만8400원→1만4300원

흑염소 시세가 급락하고 있다. 22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1~6월 전국 지역축협의 가축시장에서 거래된 흑염소(거세) 생체가격은 ㎏당 평균 1만4287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연평균 가격이 ㎏당 1만8433원이었는데, 단숨에 23% 떨어졌다. 농가 사이에선 “요즘 시세는 ㎏당 1만원도 안 된다”는 반응도 많다. 한 흑염소 농가는 “작년 이맘때엔 생체가격이 ㎏당 1만5000~1만8000원이었는데, 요즘은 7000~8000원정도 한다”며 “최소한 1만2000원은 돼야 인건비에 사룟값까지 건지는데, 지금은 키울수록 ‘마이너스’인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작년 초만 하더라도 흑염소 가격이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흑염소가 ‘개고기 반사효과’를 누릴 것으로 전망돼서다. 지난해 1월 국회를 통과한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 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개 식용 종식법)’ 때문이다. 이 법으로 개고기 유통은 물론 보신탕집을 새로 여는 것도 금지됐다.

보신탕의 빈자리는 흑염소가 채울 것으로 예상됐다. 흑염소는 과거부터 여름철 보양식으로 통했던데다, 소비자들도 흑염소탕이나 진액에 대한 거부감이 개고기보다 덜해서다. 발 빠른 가게 사장님들은 보신탕이 적힌 간판을 흑염소로 바꿨고, 경매시장에선 흑염소 낙찰가가 한우를 뛰어넘기도 했다.

사진=농림축산식품부 제공

사진=농림축산식품부 제공

상황이 바뀐 것은 수입산 때문이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올해 1~8월 흑염소를 포함한 염소 고기 수입량은 6790t으로, 작년 같은 기간(5325t)보다 27.5% 증가했다. 한여름인 8월 기준으로 보면, 지난달 염소 고기 수입량은 1370t으로 1000t을 훌쩍 넘었다. 이는 작년 8월(855t)보다 50% 넘게 늘어난 물량이다.

202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염소 고기 수입량은 관세청 통계에서 검색조차 되지 않을 만큼 미미했다. 그런데 개 식용 금지 논의가 본격화한 2022년 수입량이 3322t을 찍더니, 2023년 5995t, 2024년 8143t으로 급증했다. 올해는 3분기를 마치기도 전에 7000t에 육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개고기의 빈자리를 외국 흑염소가 차지한 셈이다. 식당 점주들이 가까운 국내 흑염소 대신 외국산을 찾는 이유는 뭘까. 국내서 기르는 재래종 흑염소가 수입산보다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 있다. 재래종 흑염소는 1년 넘게 키워야 할 정도로 성장 속도가 느리고, 체중도 50㎏ 안팎이라고 한다. 그런데 해외 흑염소(보어 종)는 12개월만 키워도 60㎏ 넘게 체중이 붇고, 100㎏가 넘는 대형 흑염소도 많다는 설명이다.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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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염소 고기에 수입쿼터 도입해달라" 요구도

흑염소 농가들은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개 식용문화를 근절하겠다”는 정부 정책으로 뜬금없이 피해를 보게 됐다는 입장이다. 흑염소 수입량에 ‘쿼터’를 도입하자거나, 적어도 수입산을 국내산으로 속여 파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해달라는 요구가 많다. 한 흑염소 농장주는 “흑염소를 판다는 식당을 가보면, 국물 내는 뼈다귀만 국내산이고 정작 고기는 수입산인 곳이 허다하다”고 불만을 표했다. 한국 흑염소협회 관계자는 “지금 법령대로는 국내산을 1% 쓰고 수입산을 99%로써도, ‘국내산·수입산’이라고 써 붙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식당 점주들은 “국내산 흑염소 자체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라고도 말한다. 국내서 기르는 흑염소는 주로 진액 같은 추출물을 만드는데 쓰이다 보니, 정작 염소탕이나 염소 고기로 쓸 국내산 물량은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주무 부처인 농식품부도 자체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재래종 흑염소의 성장 속도를 앞당기기 위해 종자를 개량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단 흑염소는 소나 돼지, 닭과 달리 개량에 참고할만한 ‘축군’이 없어 단숨에 큰 진전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다. 흑염소 소비 시장을 키우기 위해 ‘구이 문화’를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육류가 많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려면 돼지고기처럼 쉽게 구워 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흑염소는 염소탕이나 진액으로만 먹다 보니 소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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