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운의 히코노미] 세계화가 낳았다 세계를 구한 영웅 그는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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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 포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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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아내는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입니다. 가족 외출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준비를 마친 아내가, 남편과 가볍게 뺨을 맞댑니다. "다녀올게요." 남편의 표정은 씁쓸합니다. 아내가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막을 순 없었습니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은 자신의 '상관'. 남편의 출세를 위한 '미인계'였던 셈입니다. 고관대작을 염원한 그는 아내의 외도를 눈감았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노고를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기울어가는 귀족 가문에 시집온 부잣집 딸. 남편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했던 조강지처. 남편을 두고 어떻게 다른 남자와 연인이 될 수 있냐는 세간의 비난을 그가 귀담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랜돌프 처칠과 그의 부인 제니 제롬의 이야기입니다. 어디인지 낯이 익은 성. 맞습니다. 이 막장 부부의 아들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경제사를 다루는 히코노미에 웬 정치인이냐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습니다. '세계화'라는 경제적 충격파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경제는 언제나 미시적 삶의 실타래를 흔들기 마련이지만, 때로는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기도 합니다.

처칠 어머니 제니 제롬의 초상화.

처칠 어머니 제니 제롬의 초상화.

잉글랜드 귀족을 덮친 세계화라는 파고

19세기는 세계화의 시대였습니다. 미국 아메리카 광활한 대륙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물품과 황금빛 곡물들이 유럽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세계화의 파고는 취약한 계층부터 닥친다지만, 때론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부유한 잉글랜드 귀족들 역시 세계화 유탄을 그대로 맞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부터. 1800년대 들어 영국은 곡물법을 도입했습니다. 자국 농업을 보호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혜택은 농민과 귀족을 아우릅니다. 그들의 광활한 영지에서 막대한 소작료를 얻어서였습니다. 높은 곡물 가격은 짭짤한 수입으로 이어지는 구조였습니다.

상황은 1840년 급변합니다. 당시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아일랜드에서 '감자 대기근'이 벌어집니다.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풍경들. 감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던 민중들. 당시 총리였던 로버트 필은 지시합니다. "곡물법을 폐지하고 농작물을 값싸게 수입하겠다."

무역 장벽이 무너지자, 곡물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아사(餓死) 직전 아일랜드 사람들에겐 작은 빛이었으나, 잉글랜드 귀족과 농민에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곡물 가격이 폭락하면서였습니다.

영국의 밀 가격은 1800년대 초 t당 10파운드였지만, 1870년이 되면 3파운드로 떨어집니다. 3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한 것이었지요. 대영지를 보유한 귀족들의 수입도 그만큼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대저택과 윤택한 삶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세계화가 잉글랜드 귀족을 강타한 셈입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귀족 작위를 유지하고 있던 처칠 가문(말버러 공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대서양에서 남루한 귀족에게 손을 내밀 구원자가 도착했습니다. '달러 공주'라고 불리는 미국의 부잣집 딸들이었습니다.

유럽에 상륙한 '달러 공주'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걸출한 경제 거물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철도·철강·석유·백화점 등 거대한 산업이 미국을 거인으로 만들던 시절입니다. 막대한 부에도 이들의 허영은 차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교계 상류층에 진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올드머니(Old Money)로 불리는 오랜 전통의 부자들은 이들을 "벼락부자"로 폄훼합니다. "돈으로 계급을 살 수 없다(Money can't buy the class)"는 것이었지요.

욕망은 부정당할수록 들끓기 마련입니다. 신흥 부자들은 결코 포기를 몰랐습니다. 자신의 자녀에게만큼은 '귀족'이라는 타이틀을 어떻게든 달아주고 싶었습니다. 미국 내 사교계의 견고함을 깨닫고 그들의 새로운 행선지를 정합니다. 미국의 모든 상류층이 갈망하는 그곳. 대서양 건너 영국 런던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부잣집 규수들은 영국 귀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지적 수준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 데다가, 신대륙 특유의 발랄함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남성 앞에서도 당당히 매력을 과시하는 모습에 점잖은 귀족들마저 쉽게 매료됩니다. 거기에 엄청난 재산은 또 어떻고요. 영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7세는 미국에서 온 여성 손님들을 만나는 걸 열렬히 즐겼을 정도입니다.

'달러 공주'들의 유럽 공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가난한 잉글랜드 귀족들은 너도나도 미국 상속녀와의 혼인을 추진합니다. 경제 위기를 맞은 가난한 집안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높은 계급인 공작(Duke) 서른 개 가문 중에서 여섯 개 가문이 '달러 공주'와 결혼했을 정도였습니다. 귀천상혼을 금기로 여기던 영국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세계화가 그린 역설적 풍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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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지참금으로 산 영국 귀족들

결혼도 비즈니스라지만 잉글랜드 귀족에게는 그야말로 대박 사업이었습니다. 철도 가문의 콘수엘로 밴더빌트는 영국의 가장 명망 있는 말버러 공작(처칠 가문과는 다른 인물입니다)과 혼인합니다. 지참금은 무려 오늘날 가치로 4억달러. 한화 550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미국 부자들의 '신분 콤플렉스'를 여실히 드러내는 액수입니다.

'달러 공주'들 중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제니 제롬이었습니다. 뉴욕 금융가의 딸로 태어난 제니 제롬은 런던 사교 모임의 스타. 화려한 외모에 수려한 언변이 런던 귀족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왕 에드워드 7세가 그녀를 유독 좋아했습니다. 에드워드는 런던 귀족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귀족 랜돌프 처칠을 소개해준 배경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습니다. 제니 제롬은 명석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아우라를 뽐냈습니다. 랜돌프 처칠은 귀족으로서 제니 제롬에게 지금껏 누리지 못한 '신분'의 고귀함을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1874년 4월 두 사람이 결혼에 성공합니다. 만난 지 6개월 만이었습니다. 지참금은 오늘날 가치로 3000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400억원에 달하는 거액입니다. '레이디 처칠'로 불리기 위해 지급해야 할 돈이었습니다. 이때 태어난 아들이 후에 영국의 영웅으로 자라날 '윈스턴 처칠'이었지요.

결혼 후에도 제니 제롬은 여전히 영국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7세는 파티가 열릴 때마다 그녀를 찾았을 정도였지요. 제니 제롬 역시 빠지지 않고 왕의 곁을 지켰습니다. 남편의 정치적 성공을 위한 작업을 위해서였습니다. 때때로 에드워드 7세는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불렀습니다. 랜돌프 처칠 역시 이를 알고도 묵인합니다.

그녀의 혼외 정사가 늘어날수록 남편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랜돌프 처칠은 '토리'라고 불리는 보수당 대표 자리까지 오르지요. 양처(良妻)와 악처(惡妻)의 경계에 제니 제롬이 있었던 셈.

랜돌프 처칠과 제니 제롬이 닦아놓은 길에, 아들 윈스턴 처칠도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정부 주요 요직을 가기 위해서 필수적이었던 군대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도 제니 제롬의 공이었습니다. 뉴욕, 쿠바, 인도를 누비면서 윈스턴 처칠은 세계 정세를 읽는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1941년에 만난 루스벨트와 처칠.

1941년에 만난 루스벨트와 처칠.

세계화의 아들, 세계를 구하다

세계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히틀러의 등장이었습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유럽은 화염에 휩싸입니다.

유일하게 항복하지 않았던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윈스턴 처칠이 있었습니다. 전임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히틀러에 신뢰를 드러낼 때도 그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1940년 5월 신임 '총리' 윈스턴 처칠은 말합니다.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하늘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 땀, 눈물뿐입니다." 국민을 하나로 만드는 명연설이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근거 없이 승리를 맹신하는 어리석은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나라' 미국의 참전을 끊임없이 독려한 인물이 윈스턴이었습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만이 이 전쟁을 끊을 유일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집무실에는 윈스턴 처칠로부터 온 수많은 서신이 쌓였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동맹은 단순한 군사적 협력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공동의 투쟁입니다." 전 세계의 인권과 평화를 위한 양국의 협약 '대서양 헌장'이 완성됩니다. 현대 유엔의 기초가 된 조약이었습니다. 헌장이 체결된 지 4개월 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합니다. 미국은 먼지가 쌓인 탱크와 비행기 엔진에 기름칠을 시작합니다. 그토록 고수하던 '고립주의'의 폐기였습니다. 이때 조용히 미소 짓는 남자.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4년 후, 억압받는 피식민 국가들 대다수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세계의 절반 이상은 승리를 향한 그의 집착, 미국 참전에 대한 그의 믿음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나를 좋게 평가할 것입니다. 내가 바로 역사를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칠은 언제나 조국을, 역사의 진보를, 더 나아가 자신을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 영국의 엘리트주의와 어머니의 나라 미국의 개척정신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세계화의 파고는 영국의 귀족을 무너뜨렸지만, 윈스턴 처칠이라는 거물을 낳았습니다. 망상에서 허우적대면서 극도의 혼란을 불러온 누군가와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지도자와 시민이 함께 나아가는 1940년의 영국, 시민이 취해 있는 지도자를 일으켜 세워 꾸짖어야 하는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인의 질이 나라의 국격을 결정한 셈입니다.

경제라는 어려운 식재료를 역사라는 맛있는 양념으로 요리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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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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