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운의 히코노미] 무역DNA 무장한 바이킹의 후예 영국 산업혁명 첫 단추 끼웠다

◆ 매경 포커스 ◆

누구에게나 별의 순간이 있습니다. 따뜻한 봄, 그에게도 그날이 찾아옵니다. 흠모해온 연인에게 청혼의 뜻을 전달할 결심이 섰기 때문입니다. 뽀얀 얼굴에 귀티가 흐르던 그녀, 내 마음을 한순간에 뒤흔든 그녀. 편지에 적어 내려가는 한 자 한 자에 자신의 마음을 담습니다.

일주일이 흘렀을까요. 그녀로부터 편지가 도착합니다. "신분이 천한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남자가 사생아 출신이라는 걸 문제 삼은 것이었습니다. 모욕을 가득 담은 거절의 뜻이었습니다.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노라는 맹세는 분노의 열기에 타버렸습니다. 그녀의 거처로 달려갑니다.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 앞에 섰습니다. 뺨을 갈기고 머리채를 잡아챕니다. 말 안장에 얹어놓은 박차를 가져와 옷을 갈기갈기 찢었습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 정신을 차린 가족들이 미친 사내에게 칼을 겨눕니다. 딸을 욕보인 데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그때 칼끝에서 두 팔을 뻗어 막아서는 한 여자. 방금까지 모욕당했던 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외칩니다. "전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됐어요."

사디즘(가학주의)과 마조히즘(피학주의)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이 사랑꾼들의 이름은 윌리엄과 그의 연인 마틸다였습니다. 두 사람은 후에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를 세우는 군주가 됩니다. 제국이 될 잉글랜드 경제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한 커플의 행보는 경제사의 영토 위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바이킹에서 프랑스 귀족이 되기까지

'바이킹의 후손.'

이름은 윌리엄. 직업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공작. 가학 성향은 그의 핏줄에 이미 심겨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선조가 '바이킹'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이킹은 그저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에서 튀어나와 전 유럽을 호령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이웃 브리튼섬에서 노략질을 일삼다가 저 멀리 이탈리아 시칠리아까지 점령합니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이들 역시 바이킹일 정도로 항해에 능했습니다.

그들은 무역에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약탈이 불가능한 도시의 성벽에 부딪힐 때면 그들은 전사의 갑옷을 벗고 기꺼이 상인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서쪽부터 지중해를 건너 아랍 세계까지. 실제로 스웨덴 바이킹 주거지역에서는 아랍에서 유통된 동전이 대량으로 발견될 정도였습니다.

지근거리에 있는 프랑스는 바이킹을 막을 만큼 국력이 굳건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약탈의 표적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해안 주민들은 언제나 불안에 떨었습니다. 프랑스 군주 루앙 3세가 묘안을 떠올립니다.

바이킹들에게 땅을 하사하고 그곳의 영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대신에 붙은 조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다른 바이킹들의 침략을 막아주는 것. 서유럽판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친다).

프랑스 서쪽 해안가 지역을 '노르망디'라고 부른 이유였습니다. 북방인의 땅이란 뜻이었습니다. 바이킹의 후손 윌리엄은 이제 어엿한 노르망디의 공작으로 불립니다.

윌리엄이 사랑을 쟁취하는 방법

"저는 사생아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타이틀. 떡 벌어진 어깨와 타고난 배포까지. 윌리엄은 누가 봐도 훌륭한 신랑감이었지만,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가죽을 만드는 무두장이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로버트가 불륜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정통성을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프랑스 왕가의 피가 흐르는 플랑드르 귀족 마틸다가 그와의 결혼을 거부했던 이유였지요.

바이킹은 포기를 모릅니다. 윌리엄은 말을 타고 노르망디에서 플랑드르 브뤼헤까지 달려가 사랑을 쟁취합니다. 마틸다도 그의 박력에 매료된 모습입니다. 이제 윌리엄은 노르망디의 영주이자 플랑드르의 어엿한 사위였습니다. DNA에 내재한 바이킹의 혈기는 그의 눈을 나라 밖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도버해협 건너 잉글랜드였습니다. 때마침 잉글랜드 군주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잉글랜드의 왕좌를 노리는 사람은 둘. 노르망디의 윌리엄과 잉글랜드의 귀족 해럴드였습니다.

한 나라를 두고 벌어진 일대 격돌. 헤이스팅스 전투였습니다. 승리는 윌리엄의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외국인을 군주로 모시게 될 비운의 운명에 놓입니다. 그를 '정복왕 윌리엄'으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전쟁에서 무역으로

"대륙과 잉글랜드를 연결하라."

윌리엄의 사람들은 점령군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앵글로색슨 귀족들의 영지를 모두 빼앗아 노르만 귀족들에게 분배했지요. 4000명이 소유하던 영지가 고작 200명인 귀족들에게로 나뉩니다.

혹시라도 앵글로색슨이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새로운 노르만 영주들은 철옹성을 지었습니다. 잉글랜드 전역에 고풍스러운 성들이 많이 남게 된 배경입니다. 앵글로색슨족은 분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곡괭이나 호미 따위로 으리으리한 성을 무너뜨릴 수도 없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치욕의 역사로 보이지만, 잉글랜드 경제는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유럽 대륙으로 향하는 잉글랜드 무역선이 많이 늘어나면서입니다. 윌리엄과 마틸다가 프랑스에 있는 영지 노르망디·플랑드르와 잉글랜드의 교역을 추진한 것이었지요. 정치적으로 이뤄진 'FTA'라고 해야 할까요. 자급자족의 경제 체제에서 무역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셈입니다. 바이킹의 무역 DNA가 윌리엄의 피에 살아 숨 쉬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섬유 산업에서 '시너지'가 톡톡 터져 나왔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고품질의 양모로 유명했습니다. 플랑드르는 섬유 만드는 기술로 이름났지요.

잉글랜드의 양모가 플랑드르로 더욱 많이 수출되면서 플랑드르는 유럽 최고의 섬유 생산지역으로 발돋움합니다. 무역이 국부의 원천이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경제사의 진리입니다. 부가 쌓여가자 요크와 같은 무역 도시들도 점차 덩치를 키워갑니다.

무역으로 얽힌 끈끈한 관계 덕분에 14세기 일어난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초기 플랑드르가 잉글랜드에 지지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주군 국가인 프랑스 대신에 무역 파트너 외국의 편을 든 셈. 경제는 언제나 안보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양모의 나라로 발돋움한 잉글랜드

윌리엄은 죽었으나 그가 구현한 세계는 계속됩니다. 200년이 지난 14세기에도 양모는 잉글랜드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습니다. 유럽의 주요 도시는 잉글랜드의 양모 없이 살 수 없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수출을 기반으로 한 부가 산업과 금융업의 발달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양모 산업으로 돈을 벌어서 금융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뒤 재무장관에 오른 인물(윌리엄 드 라 폴)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영국 상원의원들은 양모로 채워진 붉은색 의자에 앉습니다. 중세부터 이어져온 전통입니다. 영국의 대표 무역 상품인 만큼 지도계층부터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였지요. 양모 사업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익집단인 '길드'를 만들기도 합니다. 유럽에서 길드가 등장한 건 잉글랜드가 처음이었습니다. 이제 양모 없이는 잉글랜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 낳은 혁신

국가적 분쟁이 무역에 영향을 끼치는 건 오늘날만의 이야기는 아닌가 봅니다. 14세기 프랑스 군주 샤를 4세가 후사 없이 죽자 잉글랜드 군주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합니다. '백년전쟁'이었습니다.

무역선이 다니던 바닷길을 양국의 군함이 가로막습니다. 플랑드르에는 잉글랜드 원료 양모 공급이 중단됩니다. 잉글랜드에는 플랑드르에서 만든 섬유가 들어오지 못했지요.

위기는 새로운 산업의 밀알이 되기도 합니다. 잉글랜드가 섬유를 자체 생산하기로 결심합니다. 조악하기 그지없었지만, 플랑드르에서 직접 기술을 배워 온 이들이 합류하면서 품질은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왕실이 주도해 이들을 거액을 주고 스카우트했기 때문입니다. 백년전쟁이 끝날 즈음 잉글랜드의 '울 클로즈'(양모로 만든 옷)가 유럽 각국으로 수출될 정도였습니다. 양모만 생산하던 국가에서 완제품 생산 강국으로.

이스트앵글리아, 요크셔, 서머싯 같은 지역은 섬유공업으로 이름을 알렸을 정도였습니다. 잉글랜드는 비록 백년전쟁에서 패했지만, 그들에겐 섬유 산업이라는 대들보가 생겼습니다. 정치적 패배, 경제적 승리라는 역설. 백년전쟁이 불러온 혁신이었습니다.

섬유공업은 혁신이 들끓는 공장이었습니다. 사업가들은 언제나 고민합니다. 좀 더 양질의 옷을 좀 더 쉽고 편리하게 만들 방법을. 그렇게 처음 만들어진 혁신의 결과물이 방적기계였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기계였습니다.

기계가 만드는 옷이 시장에 나왔습니다. 사람이 기계로 만든 옷으로 갈아입자, 전 산업도 기계화라는 옷을 입었습니다. 훗날 사학자들이 '산업혁명'이라고 부른 인류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이 혁신을 기반으로 전 세계의 절반을 먹어치우는 제국으로 성장합니다. 여자를 무식하게 때리곤 했던 한 바이킹이 불러온 나비효과였습니다. 경제는 언제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곳에서 새로운 길을 닦았습니다. 정복왕 윌리엄을 보며 든 생각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경제위기를 부디 불안해하지 마시기를. 어떤 곳에서 또 다른 혁신이 그 씨앗을 틔우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우리나라 경제는 언제나 위기를 딛고 진보한 역사를 증거합니다.

경제라는 어려운 식재료를 역사라는 맛있는 양념으로 요리해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강영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