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경 포커스 ◆
볼이 쑥 꺼진 여인들이 도시를 배회합니다. 도시는 자욱한 안개만 가득합니다. 엄마 손을 잡은 여자아이는 뼈에 살가죽만 간신히 달린 모습. "배고파"라는 원초적인 말조차 할 기운이 없습니다. 얼굴에 기름이 흐르는 남성이 모녀 앞을 가로막습니다.
여성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남성은 동전 몇 개를 세더니 여성에게 건네줍니다. 남성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그 길로 떠납니다. 배가 고픈 나머지 아이를 팔아넘긴 것이었습니다.
1845년 영국령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감자 대기근'이 부른 대비극이었습니다. 100만명이 굶어 죽고, 100만명이 이민 간 인류 역사상 최악의 기근으로 기록되는 사건.
짓이겨지고 으깨졌을지언정, 그대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이 기근 속에서도 자신만의 걸출한 경제적 기둥을 우뚝 세웠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국 동부 보스턴에는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간 그들의 땀방울이 그대로 얼룩져 있습니다.
감자병이 바꾼 아일랜드 풍경
"감자가 병이 들었다."
대재앙은 불연히 닥쳤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주식인 감자에 병충해가 생겨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감자는 아일랜드인의 밥이자 반찬이었고 간식이었습니다. 아일랜드의 스산한 날씨에서도 무럭무럭 자라주던 고마운 작물. 어린아이의 배를 손쉽게 채울 수 있는 신의 선물. 감자가 없다는 건 아일랜드인에게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구휼(빈민을 구제함)의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국의 고관대작들은 이를 멀뚱멀뚱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엇보다 '자유방임'을 신처럼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수요공급 원칙에 따라 가장 최적의 방식으로 양식을 공급할 것이란 믿음. 아일랜드를 구제해야 한다는 법안이 꾸준히 올라왔으나 영국 의회의 자유방임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건 대재앙이었습니다. 100만명이 먹을 것을 찾지 못해 죽어버린 대참사였습니다. 삶의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불모의 땅 아일랜드. 1845년 대기근 이전에 800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10년 후에는 600만명으로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살아남은 자에겐 아비규환이 펼쳐집니다. 사회를 지배하는 질서는 '힘의 논리'였습니다. 먹을 것이 있는 자들은 허기진 이들을 가혹하게 지배합니다. 가장들은 뺨을 맞으면서 먹을 것을 구걸했고,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았습니다. 나이 든 사람, 젊은 사람, 결혼한 사람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대기근 직후 사생아 비율이 10%로 치솟은 배경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가톨릭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수치였습니다. 대기근 이전 사생아 비율은 1%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자유방임이 만든 지옥도였습니다.
미국에서도 이어진 차별
"아일랜드인들은 하얀 검둥이다."
도저히 먹고살 길이 없는 아일랜드인들은 고향을 등졌습니다.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며 떠날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 미국으로 향한 사람들만 100만명. 좁디좁은 배에서 짐짝처럼 구겨져 몇 날 며칠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었지만, 아일랜드에서 기약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관짝선(Coffin Ships)이라고 불리는 배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가득했던 이유였습니다.
보스턴, 필라델피아, 뉴욕에 도착한 아일랜드 사람들. 그들을 기다린 건 환대와 양질의 일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멸시와 빈곤이었습니다. 중노동과 조악한 살림이었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너무나 많은 이민자가 몰려들면서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상점에 'No Irish Need Apply(아일랜드인 사절)'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고약한 인종주의자의 집은 더 노골적입니다. 'No dogs, No blacks, No Irish(개와 흑인 그리고 아일랜드인 사절).'
그래도 아일랜드 사람들은 희망을 봤습니다. 고향의 허기짐과 죽음보다는 나았기 때문입니다. 우는 아이에게 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값싼 임금을 받고 온종일 노동해야 하는 거친 삶의 연속이었지만 미국은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거센 사투리가 조롱받아도, 그들의 외모를 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아일랜드라는 이름의 씨앗은 아메리카의 토양에 더 깊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보스턴 도시 확장 사업과 뉴욕 운하, 철도 건설이 아일랜드인에 의해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세계 최대 도시인 미국 동부의 건설 현장에는 언제나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세 잎 클로버가 피어 있었습니다.
전쟁 영웅이 된 아이리시
"잉글랜드의 귀족 출신인 남군을 무찌르자."
1860년 미국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의 주들과 노예 해방을 주장한 북부의 주들이 전쟁을 벌이면서였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터를 잡은 동부 지방은 북부의 핵심 지역. 북부 정치 지도자들은 아일랜드인들에게 호소합니다.
"북부를 위해 싸우고, 진정한 미국인이 되어 주십시오." 1862년 7월 미국 의회는 민병대법(Militia Act)까지 통과시킵니다. 미군에 입대해 명예제대한 사람은 인종과 관계없이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획기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아일랜드의 지도자들과 이민자들은 기꺼이 총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새로운 조국에 헌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계급주의와 인종주의로 물든 남부군에게서 잉글랜드 귀족의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영지를 소유한 남부 농장주들은 영국 지주계급처럼 행동했습니다. 남북전쟁에 참여한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90%가 북부군에 헌신한 배경입니다. 북부군 아일랜드 여단(Irish Brigade)의 탄생이었습니다.
페니언 형제단이라는 아일랜드계 비밀 결사체들 역시 북부군에 합류했습니다. 남북전쟁에서의 경험을 통해 추후 영국과의 독립전쟁에 활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전쟁에서의 봉급 일부를 아일랜드의 독립군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겐 남북전쟁과 독립전쟁은 구분되지 않았던 셈입니다. 남북전쟁은 아일랜드인들을 미국의 주요 구성원으로 이끄는 마차였습니다. 전쟁에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운 이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독립을 놓지 않는 아일랜드인들
감자 기근이 발생한 지 어느덧 60년이 흘렀습니다. 굶주린 소녀는 살이 통통히 오른 할머니가 되어 있었습니다. 허기와 분기에 가득 찬 과거를 흐르는 강물에 흘려보낼 만도 한데,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서양 건너 고향 아일랜드 사람들은 여전히 '대영제국'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감자 대기근'은 아스라한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온몸에 상처를 욱신거리게 하는 현재진행형 기억이었습니다. 수많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다시 그들의 고향 땅으로 돌아갑니다. 아일랜드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였습니다. 그중 한 명이 에이먼 데벌레라였습니다.
데벌레라는 미국에서 고아로 자랐지만, 아일랜드계 공동체의 보호 속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일랜드 더블린의 대학 장학생으로 진학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지요. 아일랜드 의용군에 투신한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 채권'이었습니다.
아일랜드 공화국이 국제적으로 승인될 경우에만 상환할 수 있는 사실상의 '부실 채권'.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500만달러가 넘는 자금이 모였습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27만명이 십시일반 돈을 모은 덕분입니다. 뉴욕시장 존 하이런과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도 지지성명을 냈을 정도였습니다. 이 자금을 받은 아일랜드 독립군이 3년 동안(1919~1921년) 대영제국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1937년 아일랜드가 헌법을 제정해 공화국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합니다. 13년 후 영국 제국은 아일랜드의 영연방 탈퇴를 승인했습니다. 800년 동안의 식민의 설움을 닦아낸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망명객이나 이주민이 아닙니다. 조국과 나아가 모든 인류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아일랜드의 시대가 왔습니다."
1963년 6월 모든 아일랜드의 사람들이 한 사람의 연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어떤 이는 먹먹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봅니다. 미문의 연설도 연설이거니와 고난의 과거가 다시 떠올라서였습니다. 연설자의 이름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 그의 연설이 더욱 특별했던 건 케네디가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습니다.
감자 대기근 때 미국으로 건너와 일용 노동자로 일했던 케네디 가문은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이었습니다. 저임금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정치인으로, 마침내 대통령까지 올랐습니다. 이민자의 후손이 세계 최강국 대통령이 되어 돌아온 셈. 감자 하나를 구하지 못해 눈물로 목이 멘 채 거리를 전전해야 했던 가난한 아일랜드인을 위로하는 장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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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