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정치사 ‘삭발’ 첫 등장은 1987년
‘투쟁’의 상징…시각적 효과 극대화
野 의원들, 尹 탄핵 촉구하며 삭발
헌재 앞서는 시민들 ‘500명 삭발식’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유교적 사상이 강했던 우리 전통 사회에서는 본래 머리털 하나까지도 소중히 여겼다. 공자의 ‘효경(孝經)’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처럼 머리카락을 포함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다치지 않고 소중히 간직해야 하고 그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게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었다.
오늘날 정계 인사 등의 삭발이 ‘투쟁’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까닭도 이같은 전통적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극한 대치 상황에서 결연한 의지를 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삭발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도 잇따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박홍배·김문수·전진숙 의원은 지난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헌법재판소의 윤 대통령의 파면을 촉구하며 삭발식을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박찬대 원내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의원 30여명이 모여 세 사람을 응원했다.
삭발에 나선 박홍배 의원은 윤 대통령이 헌법이 보장한 삼권분립을 무너트렸고, 검찰은 권력자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윤석열의 온전한 탄핵을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을 받들어 정의가 바로 설 때까지 이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삭발은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신체를 담보로 최후에 선택하는 시위 수단으로 여겨진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강력한 투쟁을 독려하는 효과가 있다. 또 외부적으로도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한국 정치사에 삭발이 처음으로 등장한 건 38년 전이다. 1987년 당시 신민당 소속이었던 박찬종 전 의원이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YS)·김대중(DJ), 이른바 ‘양김’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삭발을 자청한 게 시작이었다.
13대 대선은 현행 헌법 ‘87체제’가 갖춰진 뒤 처음으로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았던 선거다. 이 때문에 군사정권의 종식을 알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컸지만, 박 의원의 삭발과 단식에도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대선에서도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가 당선됐다.
결과와 상관없이 박 의원의 삭발은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일각에선 결연한 의지를 내비치는 데 효과적이라는 평이 나왔고, 이때부터 정계 인사들이 삭발을 하는 일이 수시로 있었다. 물론 박 의원과 마찬가지로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박 의원의 삭발 후 10년 뒤인 1997년에는 김성곤 전 국민회의 의원이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머리를 밀었다. 1년 뒤에는 나주시장 공천헌금 의혹에 연루돼 수사받던 정호선 전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삭발하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는 집단 삭발이 유행처럼 번졌다. 2007년 한나라당 소속 김충환·신상진·이군현 의원이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며 단체 삭발했다. 2010년에도 자유선진당 류근찬 의원 등 5명이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 방침에 반발하며 단체 삭발했다.
또 2019년에는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조국 법무부 장관의 파면을 촉구하며 삭발을 단행하기도 했다. 당시 제1야당 대표가 초유의 삭발 투쟁에 나선 것을 두고 평가는 엇갈렸다. 보수층에서는 지지가 쏟아졌지만, 극단적 수단에만 의존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윤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도 삭발을 통한 의사 표현은 잇따르고 있다. 나영민 김천시의회 의장은 지난 14일 윤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한다며 경북 김천시청 현관에서 머리를 밀었다. 전국 기초단체 의장 중 첫 사례다.
하루 전인 이달 13일에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집단 삭발을 하는 일도 있었다. ‘탄핵 반대’ 측인 자유민주수호 애국연합 회원들은 이날 헌재 앞에서 ‘500명 삭발식’을 강행했다.